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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 May 13. 2019

물건 버리기 연습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내일이면 또 다른 물건을 사겠지


맥시멀리스트의 물건 버리기 연습



퇴사  혼자 살던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본가로 다시 들어왔다. 부모님과 따로 사는 것이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기대되는 점이 있었다. 우선 월세가 들지 않고(가장 중요하다.), 엄마가 종종 맛있는 밥을 차려줄 것이고, 강아지 ‘망고 매일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사하자마자 가장  문제를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이 집에는 나의 공간이 없었다.


그간 한 달에 두어 번은 본가에 오긴 했지만 거의 잠만 자고 다시 자취하는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내 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집에 두는 엄마 덕에 모든 수납장은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5년여간 따로 살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나의 짐들을 정리해 넣어둘 공간이 한 군데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극강의 맥시멀리스트다. 새로 오픈한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면 텀블러를 준다고 해서 친구들까지 데리고 가서 필요도 없는 텀블러를 6개나 받아오는 그런 사람이다. 반대로 아빠는 거의 스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유욕이 없다. 아빠에게 세상의 모든 물건은 단 두 가지로 구분된다. ‘쓸데없는 것’과 ‘버릴 것’. 이런 두 분이 삼십 년을 넘게 (다행히) 함께 살고 계신다. 극강의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가 만나면 누가 이길 것 같은지? 나는 이 대답만큼은 단언할 수 있는데, 무조건 전자가 이긴다. 싸움은 계속되지만 전자는 비교적 아무렇지도 않고 후자는 미친 듯이 지치기 때문이다. 아빠는 청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엄마의 기준에 맞춰졌다. 물론 나와 동생이 열심히 치우고 버렸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우리도 딱히 그러진 않았다... 결국엔 나도 동생도 훌륭한 맥시멀리스트로 자랐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자취 생활 5년 동안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보다 정리정돈을 꽤나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바닥에 먼지가 있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물건들이 침대나 책상에 널려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이것저것 잘 수집하고 모으고 집에 모셔두었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척 정리해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끔찍한 혼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5년 간 차곡차곡 나의 물건을 쌓아왔는데, 당분간 나의 짐을 정리할 공간이 없는 이 집에서 살아야만 한다. 지금의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 결국 엄마를 설득해서 필요 없는 짐들을 정리하고 대대적인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큰 산은 엄마의 옷을 버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모든 짐이 다 많지만 그중에서 옷이 가장 많다. 젊었을 때부터 멋 부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때 사 모은 옷을 버리지 않고 거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패션 감각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옷을 사모으는 습성만큼은 제대로 물려받았다. 우리는 버릴 옷을 정리하면서 계속 옥신각신했다.


"이 자켓은 정말 비싸게 주고 산 건데…."

(그 자켓 입으면 은갈치 같아 보인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건 진짜 산지 얼마 안 됐는데 그 사이 살이 이렇게 쪄 버렸지 뭐야."

(내 기억에 엄마가 살이 찐 지는 십 년이 넘었다.)

"그 옷은 집에서 편하게 몇 번 입다가 버리면 돼."

(엄마가 주장하는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 몇 번 입다가 버릴 옷’은 한 오백 오십 개 정도 된다.)


"어차피 다 필요 없는 옷이잖아. 그냥 다 버려!"

"너는 내 옷은 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지?"


엄마의 원망 섞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난 마음을 단번에 간파당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얼마나 섭섭할까. 엄마는 이제 늙어서 이렇게 멋 부릴 필요 없잖아, 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내 옷도 버릴 거야…”


머저리 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머저리 같은 내 대답에 엄마는 큰 결심을 한 듯 버릴 옷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버릴 옷은 거의 천장까지 산처럼 쌓였다.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아마 싸구려라서 다 합쳐도 얼마 안 될 거야. 우리는 함께 킬킬대면서 쓸 만한 옷들은 헌 옷 수거함에 넣고, 재활용이 불가한 옷들은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두 명이서 거의 다섯 번에 걸쳐 모든 옷을 수거함까지 옮기고 나서야 겨우 다 처리할 수 있었다.


“버리니까 어때?”

“시원하네.”

“이제 정말 제때제때 버리자.”

“앞으로는 옷도 안 살 거야.”


우리는 결의에 차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둘 다 서로를 믿지는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옷을 살 거고, 또 집에 가득 쌓아 두겠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애쓰지 말고, 그냥 그때 그때 이렇게 함께 정리하고 버리면 되지 않을까. 오늘은 버리기 연습 1 회차니까 앞으로 점점 더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버릴 물건은 아직 많이 남았고,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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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소중한 도전 일기

늘 새로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하찮은 도전 일기. 목표는 오로지 꾸준한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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