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이 너무해?
퇴사 앞두고 탈색하기
언젠가의 여름날, 내 친구가 직장을 그만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미용실에 가는 거였다. “어딘가의 ‘직원’에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색으로 해주세요.” 마치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각성 후 내뱉는 듯한 대사를 치면서. 웬만한 일반인은 시도하기 어려운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친구를 보면서 다짐했다. 나도 언젠가 퇴사를 하게 된다면 꼭 탈색을 해야지.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내게도 그날이 왔다.
아이러니한 일인지 아니면 잘 어울리는 일인지, 미용실에 간 날은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었다. 마지막 출근일은 이틀 후. 퇴사를 이틀 남겨두고 굳이 미용실에 간 이유는 하루라도 탈색한 머리로 회사에 출근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눈을 흘기며 ‘쟤 뭐야? 머리 왜 저래?’하면, 그 옆의 누군가가 대답해주는 것이다. ‘아, 쟤 퇴사한대요.’ 그러면 더 이상 뭐라 하지는 못하고 내심 부러워하겠지. 바로 그런 반응을 원했다! 누군가는 관종이라며 혀를 차겠지만 어쨌든 부러울 걸. 머리가 노랗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반항 아닌가?
미용실 선생님은 우려를 표했다. “아시죠? 탈색하면 앞으로 펌도 못 하시고, 색도 처음 색에서 2주면 거의 다 빠지거든요. 그래도 굳이 하고 싶으시면 뭐 하는데….” 예상했던 일이었다. ‘손님 이건 고데기예요’라는 말이 유행으로 소비되는 시대니까.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경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던 나는 “제가 퇴사를 하거든요.” 한 문장으로 그 모든 걱정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더 묻지 않고 내 머리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걱정이 없었을 리 없다. 머리카락이 많이 상할 거고 당분간 다른 머리를 하기도 어렵겠지. 게다가 내 얼굴에 밝은 색 머리가 잘 어울릴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90년대 아이돌 같은 ‘전사의 헤어’가 될 위험도 있다. 그래도 그냥, 하고 싶었다. 사실 퇴사를 결심하면서부터, 브런치에 도전 일기를 쓰면서부터 나의 모든 행동과 결심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냥 해보자. 마흔이 되어서 내가 그때 왜 안 했지, 하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마흔에는 마흔의 즐거움이 있을 터. 하지만 그때 그 즐거움을 알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 그걸 축적해놓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까? 삼십 대에 들어선 내가 지금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는 건 그런 시도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머리카락쯤이야 뭐, 망해도 뭐 다시 염색하거나 자르면 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시 자란다. 인생은 두 번 세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 일들 투성이인데 이 정도면 단언컨대 해볼 만한 일이다. 내 상상처럼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뒷모습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나는 금발 머리를 한 채 회사에 마지막 안녕을 고했다.
안녕, 고마웠어. 이제 나는 새로운 곳으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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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소중한 도전 일기
늘 새로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하찮은 도전 일기. 목표는 오로지 꾸준한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