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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 May 16. 2023

이불을 바꿨다

삶이 알아서 흘러가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

극세사 이불과 침대 패드를 드디어 걷어냈다. 내 방이 집의 다른 공간에 비해 조금 추운 편이기도 하고, 실은 그보다 내가 너무 게으른 탓에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에서야 정리하게 된 것이다. 세탁 후 탁탁 털어낸 이불을 요즘 한창 제철인 햇볕에 널고, 다 마른 이불을 개켜 수납공간 안쪽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집에 있던 다른 차렵이불을 꺼내 침대에 새로 깔아 두었다. 아주 얇은 여름 이불은 아니지만 적당한 두께감으로 안정감을 주는 이불이다. (나는 여름에도 좀 도톰한 이불을 덮는 것을 좋아한다.) 이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쳤다. 새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탁탁 털어내고, 햇볕에 널어 말리고. 빨래 후에만 맡을 수 있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 극세사와는 달리 가볍고 시원한 촉감이 느껴진다.


기분은 좋지만 약간 생소하다. 나는 원래 일상을 이렇게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매일 청소하며 깔끔한 집을 유지하는 것. 밑반찬이나 식재료들이 상하지 않도록 냉장고를 자주 살피고 관리하는 것.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입게 될 옷들을 손이 잘 닿는 곳에 꺼내어 놓고, 이전 계절에 자주 입었던 옷들을 모두 드라이 클리닝해서 보이지 않게 보관하는 것. 주기적으로 모든 수건을 깔끔한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게는 몇십만 구독자를 지닌 유튜버의 살림 브이로그처럼 멀게 느껴진다. 내 경우엔, 스트레칭을 하다가 우연히 본 바닥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을 때 갑자기 청소를 시작한다. 하루 날을 잡고 냉장고를 정리하며(썩어가는 음식을 버리며) 왜 진작 이 모든 것을 먹어치우지 않았는지 한탄하고, 옷장과 수납장마다 가득 쌓인 옷들을 보며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한숨을 쉰다.


생소한 감정의 원인은 우습지만, 뿌듯함이었다. 동굴 속에 갇혀있던 한 시절을 무사히 건너와서 어느새 작은 일상을 챙길 줄 알게 된 스스로가 대견한 마음. 놓여 있는 대로, 혹은 엄마가 주는 대로 아무거나 덮으면서 정신없이 잠들었던 수많은 밤이 있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도, 한 계절이 훌쩍 지나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한 번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개운한 느낌이 아니라, 멍하고 피곤하고 찝찝했다. 동이 틀 때쯤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그마저도 두 시간도 못 자고 시끄러운 알람 소리 때문에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이불을 바꾸고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이 내 삶을 대단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진다. 계절, 날씨, 상태, 습관,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오늘 하루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감각한 것들을 토대로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조금이나마 정돈해나가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삶이 알아서 흘러가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 적당히 대단하고 충분히 소중하다. 오늘밤은 이 뿌듯함을 그대로 덮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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