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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 Nov 13. 2018

'후회의 스위치'를 꺼주세요

일회용 렌즈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척 봐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현기증이 났다. “갈색으로 사고 싶은데요.” 직원이 몇 가지를 보여주었고, 그 중 대충 하나를 골랐을 때는 매장에 들어간 지 15초쯤 되었을 때였다. 나의 거침없는 선택에 감명을 받았는지, 직원 분이 계산을 마치고 작은 선물을 건네 주셨다. “만 원짜리 렌즈 고르는 데 한 시간씩 걸리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빨리 골라 주셔서 감사해요.” 나의 무심하고 성의 없는 결정이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이 될 수도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뭔가를 선택할 때 크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다. 옷이나 가방을 살 때도, 심지어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거의 보자 마자 골랐다. (퇴근하고 갑자기 집을 계약했다고 했더니 친구들이 ‘집을 빵 고르듯이 골랐다’며 놀라워했다.) 고민을 많이 하지 않으니 덜 피곤한 대신 실수도 많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데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후회를 안 할 수 있냐고? 그럴 수 있다. 그냥, 안 하면 된다. 일종의 주문을 외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딱 3초만 생각하고 잊는 거야.’ 그리고 마음 속의 ‘후회의 스위치’를 끄는 상상을 한다. 돌아갈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일에 내 시간과 마음을 내어 주기엔 다른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보면 기분이 괜찮아진다. 때로는 그것도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결론(=합리화)에 이르기도 한다.

 너무 속 편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일들이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시간 여행을 다루는 드라마 <나인>에서, 주인공 선우가 20년 전의 자신을 만나 ‘너는 늘 괜찮은 선택을 했고 잘 살아낼 거라고’ 말해주는 장면이 있다. 물론 항상 좋은 선택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매순간 자신을 믿으라는 응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 수 없을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을 했던 나를 믿는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선택지는 괜찮은 것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걸 깨달은 다음부터는 그저 내 결정을, 나를 존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바보 같고 후회할 만한 일이었다고 해도 그냥 그렇구나, 거기까지. 너무 깊게 자책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날, 15초 만에 골랐던 렌즈는 생각보다 별로였지만, 선물로 받았던 눈 보호제를 아주 잘 썼다. 그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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