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상처준 부모님은
어릴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수가 없다.
아버지는 40년을 공직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는 가정주부 겸 워킹맘 이셨다.
사실 작년까지 나는 부모님과의 연을 끊다시피 하며 나를 돌보고 있었다.
내가 받은 상처, 내가 받은 아픔, 그리고 여전히 되풀이 되는 부모님의 사고(?)력.
그렇게 연을 끊고 지내던 어느날,, 유난히 부모님께 연락이 됐는지가 궁금했던날, 아버지의 뇌경색이 발병하신걸 알았고 그렇게 뛰쳐나가 만난 병원에서의 부모님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이미 왼쪽 마비가 오신 아버지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셨고 한달음에 달려온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이 얼룩진 상태였다.
그러면서 알게된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내가 알고 있던 나만 상처 받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시간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서툰나이에 시작한 가정이 올바르게 갈수가 없었고, 미성숙한 성인 두명의 대책없었던 가족계획이 불러일으킨 불행이었다.
돈은 늘 부족했고, 늘 힘들었고 애써도 애써도 벗어날수 없었던 빚,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냈어야 하는날들
난생처음 아버지의 간병을 하며 아버지의 말하기 훈련을 핑계로 그간 알수 없었던 사실들을 알게되며 내가 미워했던, 내가 슬퍼했던, 나만 아파했던 그 시간이 혼자가 아니었음을,,우리 모두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힘들었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네형제다. 내밑의 남동생을 낳기 위해 낳아져버린 셋째딸이 나다. 그렇게 가족 계획이란것 자체가 수포로 돌아가버린것이다. 낳았으니 길러야 하는데 이게 제법 돈이 든단 말이다. 그런데 벌어오는 돈은 한계가 있고 아침마다 짹짹 입벌리는 참새들처럼 입을 벌리며 돈이 필요하다는 아이들에게 곱게 돈을 줄수 없던 아버지는 스스로가 미웠으리라. 그때 퍼부었던 욕은 내게 향하던것같았지만 아마 본인에게 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연을 끊거나, 연락을 일절 하지 않는다거나, 거리를 둔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본다. 나도 그랬던 사람이고 그래왔었기에
그런데 사람이 목숨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게 없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둘러 씌우기 전에 아버지의 그때 상황을 들여다 보는것도 중요했다. 20대 초반의 아버지는 의욕만 앞섰고, 자식을 낳으며 어깨는 무거웠지만 여전히 크지 않는 마음이 자신에겐 걸림돌이었을것이다.
어떻게든 삶을 통제하고 살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아버지를 이제서야 이해한 못난 딸이다.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며 간병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것이 내게는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 같았다. 아버지는 그이후 전립선 암이 발견되었고 3기 지만 전이가 전혀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 25회를 꿋꿋히 이겨내시고 지금도 매일을 암과 싸우고 계신다.
엄마는 종갓집에 시집와 22살의 아무것도 온실속 화초처럼 공주처럼 자랐던 세상에서 어느 시골 종가집 큰며느리가 된 자신이 이해가 안됐으리라. 도시에 살다 시골에 온것도 답답한데 아버지가 생활비를 주지 않자 어머니는 미용일을 배우셨고, 그길로 미용실을 다니시며 실습을 하시다 샵을 개업하셨다.
그렇게 내 어릴때 기억은 엄마가 미용실을 하셨던 기억, 그리고 그 뒤에 딸린 방에서 아버지께 늘 혼나던 기억 억, 그리고 연탄불에 데운 물에 아침저녁으로 세수를 시켜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언니둘은 초등학생이어서 할머니집에 맡겨진채 떨어져 지냈는데 언니들에게는 그것이 상처였나보다. 그당시 부모와 지내지못했던 나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짓곤 했다. 나와 내동생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지냈지만 언니들은 한창 손이 많이 가야 할 날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겨내고 버텨보려는 이야기는 내가 들어도 너무 가슴아프고 마음이 찢어진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사람의 인생에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 알수 없다.
나의 슬픔을 나의 고통을 이글에 담는다고 얼마나 느껴지겠나
그리고 보는 사람도 느끼겠지 이정도로 힘들었다고? 내가 더 힘들었지
맞다 당신이 더 힘들었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더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서로가 버틸수 있을만큼만의 고통의 무게를 이겨내고 지금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너무 서로를 미워하진 말자. 시간이 없다 우리에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