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근 Sep 04. 2024

벽문

#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낡은 건물 벽을 담쟁이가 아등바등 오르고 있다. 조만간 벽을 온통 뒤덮을 기세다. 산책로를 오가며 날마다 마주하는 낯익은 풍경이지만, 붉은 벽에 녹색의 물감을 입힌 벽화 같아 볼 때마다 눈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억척스럽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D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읽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수천 개의 잎을 주렁주렁 달고 힘겹게 벽을 오르는 담쟁이의 모습을 그린 시를 읽고 일상의 수많은 벽에 부딪히며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담쟁이를 보다가 문득 얼마 전 보았던 TV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해 수재들만 들어가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학교생활을 담은 내용이었다. 열악한 가정 환경과 학습 여건에도 불구하고 과학고등학교의 높은 벽을 넘어 당당히 합격한 학생의 모습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매사에 열정적인 학생이라 입학 후 학교생활도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가리라 보였다. 하지만 재학 중의 학업 성적은 늘 하위권에 머물렀다. 빈부의 차이라는 또 하나의 높은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친구들처럼 어릴 때부터 고액 과외를 통한 선행 학습을 받지 못한 탓에 아무리 치열하게 공부해도 성적이 계속 하위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학업 성적의 벽은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 가정이 가난했던 옛 시절과 달리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요즘은 그 또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만 공부한 가난한 집 아이가 재력 있는 부모덕에 영어 유치원이나 초등 의대 반을 다닌 아이들의 높은 학습 능력의 벽을 뛰어넘기가 어찌 쉬우랴. 

  지난 교직 시절을 돌아보니 참 많은 제자가 인연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인문고, 실업고, 예술고 등 여러 종류의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니 실업고의 저소득층 아이들부터 예술고의 부유한 집 아이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을 만났다. 수십 년이 지난 요즘 그 아이들의 삶을 보면 부모의 재력이나 신분이 그들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절실히 느낀다. 스승의 날을 전후해 예전의 제자들과 만날 때가 있다. 실업고 제자들의 경우, 결혼 후에도 애면글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계층의 벽을 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닐지라도 열심히 일하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훈훈해진다.

  인문고에 있을 때 제자 P는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보육원에서 자란 P는 사회 배려자 전형을 통해 서울의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오로지 학교 공부만으로 거둔 놀라운 성과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환호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넘지 못할 벽이 없다는 좋은 사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좋은 환경에서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입학한 대학 친구들의 학습 능력의 벽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신분 계층과 빈부의 차로 인해 친구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던 탓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서울의 명문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친구들을 사귈 때 입학 전형을 확인한다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사회 배려자 전형으로 들어온 가난한 학생들은 다른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의 무리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한다. 아마 P는 신분 계층을 확인하며 자신들만의 인맥을 견고하게 다져 가는 대학 친구들의 배타적인 모습을 보며 계층의 벽을 넘기가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넘기 힘든 벽과 마주칠 때가 있지 않은가.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바라건대, 타고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을 수 없는 무수한 장벽들로 인해 좌절하는 것이 약자의 숙명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

  몇 달 전,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건물을 본 적이 있다. 건물 안을 걷다 보니 통로를 막고 있는 벽이 보였다.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고 있으니 벽 뒤의 누군가가 벽의 가장자리를 밀고 나왔다. 벽이 문으로 바뀌며 안쪽 공간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우리라 여겼던 벽 뒤의 공간에 밝은 빛이 비치며 답답하던 마음의 문도 활짝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통로에 거대한 벽문을 만든 건축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인생의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다양한 벽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삶에서 소통의 필요성을 전하려 했을까.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나 삶의 이치를 건축물에 오롯이 담아내고자 한 거장의 혜안이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뒤늦게 벽을 허물기보다 처음부터 벽을 만들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사회적 약자들이 넘기 힘든 벽을 만날 때, 벽이 문이 되어 열릴 수 있는 장치라도 우리 사회 제도에 더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신분이 다르고 재력이 달라도 차별하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건강하고 열린사회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은 더 살 만해지지 않겠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불리한 환경으로 인해 부수기 힘든 장벽에 부딪혀 좌절감을 느꼈을 제자 P와 과학고 학생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온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수많은 벽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하지만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라고 표현한 「담쟁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들 역시 아득한 절망의 벽을 거뜬히 넘어가길 간절히 바란다. 


이전 01화 노래하는 그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