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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근 Sep 05. 2024

아버지의 등

#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창백한 햇살이 거실로 힘겹게 기어든다. 고단한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느지막이 쉬어 보려는 심산일까. 지친 등을 벽에 기대고 멀거니 창밖을 바라본다. 해거름 생기 잃은 빛이 쉼터의 안온함에 고요히 스며들고 굴곡진 산 능선을 따라 붉은 석양이 길게 늘어진다. 

  뉘엿뉘엿 산을 넘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불현듯 해묵은 지난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잠결에 부모님의 속삭임이 나지막이 들렸다. 두 분의 근심 어린 대화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실직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의 부도로 직장을 잃은 지 몇 달이나 지났지만,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 그동안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일터를 잃고 퇴직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일 이후 내 마음은 몹시 혼란스러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맏이라는 마음의 무거운 짐이 처음으로 깊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생계에 대한 불안으로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 나날이 깊어졌다. 원하던 학과가 아니라 취업하기 유리한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당시 아버지는 가장의 책임과 역할이 한창 힘겨울 무렵이었으리라. 담쟁이넝쿨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을 힘겹게 끌어안고 가파른 삶의 벽을 애면글면 올라가던 당신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아침마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 집을 나서는 아버지는 애써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려 했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어스레한 석양빛에 적적한 기운이 감돈다. 고적한 방안을 어루만지며 벽을 타고 천천히 오르는 여린 빛이 오늘따라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빛 그림자가 나울거리는 벽에 지난 시간을 품은 가족사진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그 사진 속에 삼십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중년의 아버지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한 사진 속의 다부진 아버지의 모습은 당신이 여전히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임을 보여 주는 듯하다.

  자식들이 저마다의 보금자리로 떠나며 안개처럼 아득했던 아버지의 고난도 걷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어머니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요양 시설로 가며 아버지의 모든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끔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하고 또 서로를 챙기기도 하며 알콩달콩 살았던 아내의 부재가 주는 공허함이 아버지의 맑았던 정신을 흐리게 했다. 그 탓이었으리라. 모진 세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았던 강인했던 아버지의 심신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쇠약해지며 명민했던 정신마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스 밸브를 열어 놓는 위험천만한 일이 일상이 되고, 당신이 애지중지하던 손주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런 당신의 안타까운 모습을 날마다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비애가 절절히 스며들었다. 

  기진해진 빛이 사진 속 아버지를 천천히 감싼다. 자신의 건재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 주려는 듯 어두워진 방 안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드러내며 남은 힘을 다 쏟아붓는다.

  얼마 전 아버지는 폐렴 진단을 받았다. 폐 영상 촬영을 마치고 나오며 아버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을까. 당신께서도 죽음이 어찌 두렵지 않으랴. 단지 자식들을 생각해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무심한 척한 것이리라. 건강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삶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마치려 하는 당신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보니 생로병사라는 말이 가슴에 더 깊이 와닿는다. 자연의 이치를 누구도 피하기 힘들지만, 당신의 고통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건 아름다운 희생의 결과가 이렇듯 안쓰러운 모습으로 끝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남은 가족을 생각하며 조만간 닥쳐올 마지막 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남은 내 삶도 당신의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가족의 온갖 애환을 힘겹게 짊어진 채 앞만 보고 걸어간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를 떠올려 본다. 진정 나는 당신처럼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잘 살아왔는지. 혹여 가족의 마음에 실망을 준 일은 없는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뿐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온갖 힘든 역할을 감당해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요즘 들어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알게 되며 비로소 아버지의 기진했던 마음이 오롯이 내게로 들어온다.

  이제 아버지의 등은 예전 같지 않다. 등 푸른 생선처럼 팽팽하고 올곧던 아버지의 등은 세월을 잔뜩 품은 등나무처럼 안쓰럽게 휘어졌다. 힘들고 고된 세상살이 탓이었을까. 구부정한 자세로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는 아버지의 등에는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정작 자신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던 당신의 숭고한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가족의 행복이 이렇듯 활짝 피어날 수 있었으리라.

  언제부터인가 내 등도 조금씩 휘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비로소 아버지의 고된 등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의 의무가 쉽지 않음을 깨닫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고, 가족의 튼튼한 울타리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힘들고 고달팠다. 하지만 그 고통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 또한 내 마음을 더할 수 없이 뿌듯하게 해 주었다.

  가족 부양이라는 짐을 힘겹게 짊어진 아버지의 등은 불행이라는 어둠이 가정으로 들어오지 않게 해 준 밝은 빛이었고 가족의 든든한 지킴이였다. 아버지의 등이 휘어질수록 당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더 깊어지는 것은 굽은 등이 품은 시간 속에 당신이 견뎌 온 고통과 희생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리라.

  스멀스멀 기어든 햇살이 말없이 종적을 감춘다. 햇살도 이제 자신의 하루를 마감하려나 보다. 긴 꼬리를 슬며시 내리며 조용히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온종일 세상을 밝혔던 자신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없이 지난 시간을 품고 사라진다. 정감 어린 불그스레한 색감에서 온온한 기운이 묻어나고 빛은 어둠 속에서 긴 휴식에 든다.

  등을 켜고 아버지의 등을 설핏 바라본다. 굽은 등에 밝게 비치는 등불이 한 시대를 힘차게 살아 낸 아버지의 등에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한 가족의 주역으로 살아온 당신에게 뒤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듯하다. 

  한낮의 햇살처럼 강렬했던 아버지의 시간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 외롭고 스산하기 그지없는 삶의 종착역을 앞두고도 가족들을 위한 당신의 애틋한 마음은 아직 내려놓지 않았다. 혹여 자식들한테 부담이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이젠 칠흑 같은 어둠을 품은 밤하늘의 마지막 배려처럼 느껴진다. 나른한 달빛마저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 사위는 온통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지만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시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여린 빛이 어른거리는 등에서 알 수 없는 포근함을 느낀다. 온온한 빛을 머금은 등을 보고 있으니 그 시절 부모님의 애달픈 속삭임이 여전히 내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힘든 시간을 묵묵히 짊어진 채 가족의 마음에 안락한 쉼터를 만들어 준 아버지의 등에, 가족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그 등 위에 지난 시간의 온갖 애환을 머금은 따사롭고 은은한 빛이 조용히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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