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봄바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길을 나선다. 아쉽도록 짧아 더 애틋한 계절의 쏜살같이 지나가 버릴 풍경을 놓칠세라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앞장을 선다.
늦은 오후의 산수유마을엔 화사한 원색의 봄이 일렁이고 있다. 마을 주변 산과 들은 겨우내 드러냈던 속살을 살포시 감추며 싱그러운 향기로 인사를 건넨다. 봄의 온기를 가득 머금은 자연의 자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개울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노란 산수유꽃과 초록빛 마늘밭의 눈부신 향연에 어느새 내 마음도 무르익은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이렇게 찬란한 풍경 속에선 시간도 날짜도 잊고 그저 흘러가는 계절에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다.
시나브로 봄의 향기가 짙어가는 산골 마을에 펼쳐진 뭇 생명들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다. 지난 겨울, 인고(忍苦)의 시간을 겪었기에 이런 감동적인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리라. 처음부터 아름답기만 한 자연이 없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하는 바를 이루기까지 감내해야 할 고통의 시간은 피할 수 없는 세상 이치일 터이다.
오가는 상춘객들의 환한 표정과 훈훈하게 느껴지는 온기로 보아, 오늘의 여정이 몹시 만족스러웠나 보다. 좋은 풍경 속에 머물고픈 마음은 누구나 같지 않을까. 코로나 상황에도 꽤 많은 사람이 화사한 산수유꽃을 보려고 이곳을 찾았다.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핀 마을의 풍경을 담기 위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 그들의 모습에 즐거움이 넘친다. 카메라 렌즈에, 그들의 마음에, 오늘의 풍경이 행복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소중한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다.
마을 입구에 마스크 착용을 요청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문득 이런 상황에 방문객을 반길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북적이는 상춘객이 달갑지만은 않을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짙어지는 흙 내음 풀 내음에 구석구석 계절이 무르익고 있음을 느낀다. 그림 속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멋진 풍광에 시선을 빼앗긴 채 나도 모르게 산길로 접어든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중의 하나가 산수유꽃이라 했던가. 하지만 산속 음지에 있는 산수유나무는 아직 겨울을 보낼 생각이 없는 듯하다.
누군가의 눈엔 그저 아름답고 화사한 나무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생명줄 같았던 것이 산수유나무이다. 산수유마을이 고향인 동서(同壻)로부터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마을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산수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겉모습으로만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일 아니던가. 어쩌면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산골 마을의 숱한 사연과 애환들이 묻어있으리라.
길가에 있는 허름한 컨테이너 찻집에서 산수유 꽃차 한 잔을 마신다. 마을 주민인 어르신이 직접 우린 차 한잔에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산수유 꽃차는 밖으로 전해지는 향보다 입에서 머무는 향이 더 진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수유의 온기와 향을 느끼며 고개를 드니 찻잔 밖에도 안에도 봄이 가득하다.
산수유마을을 지나 아름다운 화곡지로 향한다. 길게 이어진 산수유나무와 동행하며 계절이 깔아준 초록의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다채로운 색들이 어우러진 화곡지가 보인다. 하늘을 담고 다양한 생물을 품고 있는 물빛 고운 풍경이 참으로 경이롭다. 이곳에서, 해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고목들을 보며 새삼 자연에 관한 신비로움을 느낀다. 어쩌면 품 넓은 호숫가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으리라.
무르익은 산수유 꽃향기로 행복했던 심신에 저녁노을이 다정히 스며든다. 고즈넉한 산자락에 펼쳐진 산골 마을의 포근한 풍경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오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 속에 걷지 못했을 이 길에,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추억으로 고이 새겨 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