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빛깔을 뽐내던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한 설산(雪山)의 풍경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때 이른 눈꽃을 가득 피워낸 겨울 산의 웅장한 자태와 무채색으로 깊이가 더해진 새하얀 전경이 마음마저 설레게 한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덕유산 눈꽃과 상고대를 본다는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다.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겨울 산행 장비를 꺼내는 아내의 마음은 이미 흰 융단이 곱게 깔린 능선을 걷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허약한 아내가 혹한의 겨울 산행을 과연 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설천봉에 오르니, 잿빛 하늘 아래에서 상고대와 눈꽃이 연출해 내는 새하얀 겨울 풍경이 몽환적인 흑백 사진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환상적인 풍경을 보며, 내가 이 시간 황홀한 경치의 한 부분이 되었음에 감동이 인다.
겹겹이 얼어붙은 상고대와 그 위에 피어난 눈꽃들이 혹한의 능선 위에 장대한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는 듯하다. 지난 며칠 간의 혹독한 추위가 있었기에 이 절정의 풍경이 탄생하지 않았겠는가.
문득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삶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혹한의 겨울 추위가 이렇게 눈부신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스러운 시련이나 아픔도 언젠가 이렇게 멋진 눈꽃으로 피어날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산 아래에서는 흐리고 간간이 햇빛까지 비치던 날씨가, 능선에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칼바람이 매섭다. 높은 산을 오를 때, 산 위의 날씨를 함부로 예단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산중 날씨가 사람이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듯 우리의 삶도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예측보다 대응이라고 했던가. 인간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미래를 추측하기보다 지금 일어난 일에 대응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혹한의 날씨와 눈길에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스틱을 돌려 단단히 고정한다.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서둘러 산길을 오른다. 혹여 미끄러질세라 발끝에 잡혀있던 우리의 시선이 어느새 하얗게 변한 능선의 나무들로 향한다. 나뭇가지마다 피워올린 눈꽃과 상고대의 화사한 모습에 쉬이 발걸음이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정상의 눈부신 풍광을 보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한다.
덕유산의 설경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같은 경치도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닿나 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순백의 풍경 속을 나란히 걸으며 아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도 그만큼 깊어지리라.
향적봉에 오르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했던 세찬 눈보라가 조금씩 잦아든다. 한참 동안 눈보라 속에 아득했던 중봉 가는 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스틱을 단단히 잡고 다시 걸음을 내디딘다.
아득한 산길처럼, 돌아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궁지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아득함 속에서도 아내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어느 틈엔가 길이 보이고 그 길은 고통을 벗어나는 출구로 이어졌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잠시 주춤했던 눈보라가 다시 거세게 몰아친다. 능선에 있는 주목과 구상나무가 세차게 흔들리며 눈발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다시 앞을 분간하기 힘들어지고 길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 혹독한 자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또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이 매서운 추위 속에서 아내와 내가 함께하며 더 강인해지기를.
그동안 산을 다니며 깨달았다.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힘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있음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더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음을. 혹한의 능선에서 거세게 달려드는 세찬 눈보라처럼, 다가올 삶의 여정에서도 많은 난관과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같은 방향을 향해 한마음으로 부단히 걸어간다면, 그 어떤 험난한 역경도 넘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지척에 보이는 봉우리도 쉬이 닿지 못하게 하는 냉혹한 산길을 걷다 보니, 멀고 아득하게만 여겨졌던 중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병약한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함께 걸어온 아내를 보며 간절히 바란다.
‘힘들었지만 함께했던 오늘의 산행을 기억하며, 남은 삶에서 어떤 역경이 와도 서로에게 품 넓은 산이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