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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근 Sep 26. 2024

마음의 벽화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골목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노인들만 이따금 오가는 쇠락한 마을엔 언제부터인가 길고양이들이 주인인 양 돌아다니고 있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물어진 담벼락엔 앙상한 꽃대만 남은 낡은 화분들이 눈길을 끈다. 굳게 닫힌 녹슨 대문과 더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빈집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마음마저 스산해진다.

  며칠 전, 유년의 친구들이 술자리에 모였다. 추억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모두 당시의 골목을 어찌나 세세하게 잘 떠올리던지. 아마 행복했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옛 마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 아련한 그 시절의 그리운 풍경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온 탓일까. 변해버린 마을 풍광이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낯설게 다가온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골목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수십 년이 흘렀으나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자식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외로이 남은 탓에 집도 동네도 노인들과 함께 늙어가는 듯하다. 낡고 해어진 한옥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추레한 마을 풍경이 안쓰러우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드는 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리라.

  마을 안 삼거리에 들어서니 허름한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낡은 집이 보인다. 결혼 전까지 이십여 년을 살았던 곳이다. 마음이 뭉클해지며 지난 시간의 기억이 불현듯 소환된다. 마을에서 마당이 가장 넓었던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이 정담을 나누고 가무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해가 질 무렵 마당과 대청마루에서는 흥겨운 놀이가 벌어지곤 했었다. 깊고 풍부한 성량의 합천 아저씨는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를 떠올렸고, 남원댁 아줌마의 신명진 춤사위는 놀이판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가무가 끝나갈 때쯤 술판이 벌어졌는데, 가끔 뒷집 아저씨가 고향 영동 산골에서 잡아 온 뱀을 안주로 올려 동네 여인들과 아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제는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이 함께 어울려 흥겨운 시간을 보내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아마 삶이 팍팍했던 그 시절엔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서민들이 힘든 삶을 이겨내는 방법이었으리라.

  미로 같은 골목 안에 낡은 간판이 붙은 이발소가 보인다. 언제 문을 닫았는지 알 수 없는 출입문엔 녹슨 자물쇠가 쓸쓸하게 매달려 있다. 유년 시절의 이발소는 마을의 온갖 사연들이 오가던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이발소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구수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돋우고 능숙한 솜씨로 면도칼을 가죽띠에 쓱쓱 갈며 나름 장인의 모습을 보여줬던 이발사의 모습도 이젠 아득한 추억의 단편으로만 남아있다. 

  추억이 그립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좁은 골목에 가만히 서 있으니 아득한 그 시절의 체취가 온온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해 질 녘이면 담장을 넘어오던 음식 냄새와 소리, 온갖 절절한 사연들이 서로 뒤엉켰던 이곳은 생계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서민들이 서로 부둥키고 챙겨주며 살았던 도시 속의 시골 같은 인정 넘치는 마을이었다. 

  선연한 가을빛 아래 동네 여인들이 함께 겨울 채비를 하던 풍경, 사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던 우물가, 우리 집 마당에 당당히 서 있던 감나무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 순간, 그 모든 풍경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인적 드문 마을 길을 걷다 보니 골목 안 낡은 담벼락에 붓을 든 화가들이 알록달록한 색색의 옷을 입히고 있다. 오래된 동네들을 벽화마을로 만드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유행한다더니 이곳도 그런 모양이다. 마을의 잊힌 이야기가 벽화 속에서나마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보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든다. 풍선을 들고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풍광까지, 마을의 역사와 옛이야기를 허물어지는 담장에 오롯이 담아내고자 정성을 쏟는 화가들의 모습이 더없이 진지하다. 그들의 손끝에서 살아나는 예스러운 마을의 모습 위에 사라져 버린 생기와 사람들의 따뜻한 정도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

  담장에 그려지는 벽화를 보며 이젠 그리운 기억들로만 남은 마을의 지난 시간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내 마음에도 살포시 그려본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따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골목 모퉁이에서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 해맑은 친구들의 모습을.

  어둑해지는 골목에 해거름 저녁노을이 다정히 스며든다. 긴 노을빛 그림자를 따라 옛 시간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지금의 나를 가만히 돌아본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황량하고 적막해진 마을과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빈집처럼 세상사에 너무나 무심해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낡은 담장에 그려진 벽화가 스산한 마을에 훈기를 불어넣듯 세파에 시달려 지친 내 마음에도 따뜻한 위로를 줄 수 있는 벽화 한 점 그려 넣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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