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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근 Sep 18. 2024

아버지의 흔적

  길가에 버려진 망가진 우산, 낡은 자전거, 고장 난 TV와 가죽 천이 벗겨진 소파 사진이 전시장에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의 제목은 ‘아버지’, 하지만 사진 속에 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고된 삶의 흔적이 깊게 새겨진 아버지의 얼굴도, 인고의 세월이 훑고 지나간 여윈 손발도, 그리고 힘없이 처진 어깨도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이 버려진 낡은 물건들에 왜 아버지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사진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혜롭고 명민하던 분이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처가가 발칵 뒤집혔다. 온 가족이 집 주변을 수없이 돌아다녔지만, 장인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당신의 달라진 언행에 모든 가족이 불안해하던 차였다. 하지만 워낙 빈틈없는 분이라, 가족 모두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 십여 가지의 직업을 전전했다. 남다른 성실함과 신용으로 사업가로서 성공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후손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들었을 젊은 시절, 사비를 들여 교회를 건축하고 장로로서 평생을 헌신했다. 선조의 믿음의 뿌리를 자녀들한테 전해주기 위해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도 보여주었다.

  장인어른을 처음 뵙던 날이 기억난다. 단단한 체구에 눈빛이 형형하고, 말씀에 힘이 있으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심하게 상한 손가락들을 보며, 녹록지 않았을 지난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손가락들은 가족을 위해 그 많은 직업에 종사했던 장인어른에게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길거리를 배회하던 노인이 신고한 분과 일치하는 것 같다고. 그 사건 이후 처가의 대문은 굳게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장인어른은 요양병원으로 갔다.

  병실에 힘없이 누워계신 당신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고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인어른이 결국 이렇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떠나시려는가. 당차고 빈틈없던 예전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위도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태가 되시다니.’

  치매 환자들도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기억하나 보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계시던 장인어른은 문득문득 자녀들을 키우던 옛 시절로 기억이 돌아가곤 했다. 그 순간의 모습은 치매 환자가 아니라, 다시 정신을 되찾은 건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마 당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으나 가족을 열심히 부양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모습 없이 아버지를 더 아련히 보여주는, 그래서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몇 장의 사진이 이렇게 마음을 울리다니. 온 힘을 다해 가족을 부양했던 강하고 든든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 속 어디에도 없다. 살과 대가 망가진 우산, 체인도 페달도 부서져 달릴 수 없는 낡은 자전거, 그리고 더는 켜지지 않는 TV와 버려진 소파가 된 아버지만이 사진 속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진 속의 망가진 물건들이 이제 쓸모없어 버려진 것들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가족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온 또 한 분의 나의 아버지, 장인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찬 빗줄기에도 가족을 든든히 지켜주는 우산이었던 아버지, 평생 가족을 위해 쉼 없이 달린 자전거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사진 속에 보인다. 가족에게 웃음을 주고 가끔은 눈물을 흘리게도 했을 TV였던 아버지, 가족이 언제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소파였을 당신의 모습만이 오롯이 보인다. 폐품처럼 늙고 병든 아버지의 모습이 이젠 안쓰럽고 아프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희생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인어른을 떠올리게 해준 부산 사진전, 전시장 문을 나서니 일출보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바다에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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