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풀들이 초록의 옷을 입으며 겨우내 스산하던 공원에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정자와 벤치에도 한동안 뜸했던 노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산책로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공원에도 이제 봄이 찾아왔나 보다.
저출산으로 인해 초고령사회가 된 탓일까. ‘어린이 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공원은 언제부턴가 노인 놀이터로 변한 것 같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책로를 걷다 보니 오늘도 익숙한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공원에서 노부부의 모습을 본 지도 어림잡아 일 년은 넘은 듯하다. 따뜻한 봄날뿐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 나란히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은 동네 사람들에게 낯익은 광경이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몸의 반쪽이 거의 마비된 부인은 남편의 부축을 받아 힘들게 발걸음을 옮긴다. 여든쯤 되어 보이는 늙은 남편이 병약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인다.
산책로 옆 정자를 지나다 보면 할머니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유명한 작가가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좋은 글감을 얻는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해서 가끔 걸음을 멈추고 정자 옆 벤치에 슬며시 앉아 할머니들의 대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곤 한다.
온갖 병들을 끌어안고 지낼 수밖에 없어서인지 정자 안에서는 병원 이야기가 주로 오가고, 가족 이야기부터 소소한 일상에 관한 일들까지 구수하게 풀어내는 할머니들의 유창한 언변은 듣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한다.
한 할머니는 수십 년을 다닌 동네 한의원 한의사가 처음 개원할 때만 해도 파릇파릇한 새싹 같았는데 이젠 대머리에 중늙은이가 돼버렸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다 돌연, 한의사가 “어르신은 타고난 불량품”이라고 놀렸다며 볼멘소리를 하니, 할머니들의 웃음소리와 비난이 뒤섞이며 정자 안이 시끌벅적해진다.
할머니들의 단골 동네 내과가 조만간 멀리 떨어진 시내 중심가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못내 섭섭함을 내비치고, 한동네에 살다가 이사 간 지인이 어느 순간부터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한 마음들도 오간다.
붙임성 좋은 남편이 의심스러워 몰래 옷깃에 묻은 향내부터 호주머니 속 먼지까지 탈탈 털어보았다는 이야기에다, 멀리 떨어진 자식과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까지, 가족에 관한 이런저런 사연들도 정자 주변을 맴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며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분들의 유쾌한 수다 속에는 한세월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쌓인 한을 이렇게나마 풀어보려는 마음도 깊이 담겨 있으리라.
벤치에는 할아버지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로 외면하듯 앉아 있다. 내리쬐는 봄볕 속에서 꾸벅꾸벅 조는 분들이 있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분들도 계신다. 가끔 장기를 두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광경도 보이지만 노년의 할아버지들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마음이 아리고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분들도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생의 겨울에 다다랐으니 그 허무감이 얼마나 절절하게 와닿을까. 벤치에 앉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봄, 빛바랜 사진 속에 멈춘 그 시절의 아스라한 기억을 애써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인들로 붐비는 공원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문득 얼마 전 겪은 일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모임을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예의 바르게 자리를 양보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고맙게 생각하며 앉았으나 젊은이의 선의가 내게는 충격으로 와닿았다. 그날 밤, 모임 내내 마음이 심란해서 퇴임식 축하연 이후 실로 오랜만에 술잔을 들었다.
나도 이제 젊은이들 눈에는 노인으로 비치나 보다. 마음은 아직 혈기 왕성했던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버렸으니. 머지않아 공원을 오가던 노인들이 하나둘 떠나고 나면 그 빈자리를 내가 이어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원 벤치에 무료하게 앉아 있거나 장기판에서 토닥대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어스름한 황혼에도 봄볕 같은 생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싶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산책로를 돌다 보니 노부부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힘겹게 발걸음을 뗀다. 정자에서는 할머니들의 우정어린 수다가 끊이지 않고, 할아버지들의 무심한 표정에는 쓸쓸함이 아련히 배어있다.
봄날의 공원엔 황혼의 삶들이 따스한 햇살 속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익숙한 풍경 다양한 사연들을 따라 내 마음도 인생 공원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