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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근 Sep 04. 2024

노래하는 그릇

#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볕뉘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초록의 숲을 스치는 바람과 솔 향이 참으로 싱그럽게 다가온다. 잠시 후, 은은하게 울리는 싱잉볼(Singing Bowl) 소리가 블랙홀처럼 번잡한 생각을 한순간에 빨아들인다. 어지러운 상념들을 순식간에 밀어내는 깊고 청아한 소리가 참으로 경이롭다. 마음이 평온해지며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는 싱잉볼의 오묘한 울림을 따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든다.

  싱잉볼은 ‘노래하는 그릇’이란 뜻을 가진 티베트의 전통 악기이자 명상 도구이다. 여러 가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싱잉볼은 금속마다 고유한 떨림이 있어 다양한 진동을 만든다. 그 진동은 사람들의 긴장을 이완시키며 편안한 치유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온갖 사연들이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공동 주택에서 지내다 보니 이웃과 소리마저 공유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과 심심찮게 마주한다. 요즘은 집 주변이 온통 아파트 공사장이 된 탓에 건설 현장에서 들려오는 굉음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한밤중, 아파트 앞 공원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대화, 취객들의 고성방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오토바이 소리 등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소음들 때문에 종종 밤잠을 설친다. 

  우주에 나가면 조용하고 적막해 보일 것 같은 지구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낸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일상에서 쏟아 내는 수많은 소음이 온 우주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상의 이런 소음에 늘 시달린 탓일까. 지친 생명에 원기를 불어넣는 싱잉볼 소리가 그래서 더 심오하게 와닿는다. 삶의 스트레스라는 고단한 매듭을 이렇듯 단숨에 풀어주는 소리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비롭다. 내면의 자아와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소리에 마음의 스위치가 다시 켜지며 공허했던 심신도 서서히 생기를 되찾는 듯하다.

  싱잉볼 소리를 들으니 문득 숲의 상쾌한 소리가 떠오른다. 어쩌면 이런 자연의 소리를 하나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낸 것이 싱잉볼이 아닐까.

  코로나가 발생한 후, 숲을 찾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원거리 여행 계획을 세울 때도 산책할 수 있는 숲이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한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숲이 전해 주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리는 우리 뇌 속에서 ‘알파파’가 흐르도록 만들어, 인간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고 자율 신경을 안정시킨다고 한다. 숲을 걷고 있으면 단지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뿐 아니라 풀벌레 소리나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가 청각을 자극해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을 느낀다. 자연의 소리가 내 마음속에 은은한 울림을 만들어,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여음(餘音)이 심신을 다독여 삶의 무게를 덜어 준다. 싱잉볼의 울림에서 자연의 소리를 떠올린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일 터이다. 

  “칭찬은 바보도 천재로 만든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교직에 종사할 때, 교사의 소소한 칭찬 한마디가 학생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그들의 삶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경험했다. 긍정적인 소리가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치유의 그릇인 싱잉볼의 울림도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며 앞으로의 삶에 좋은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명상이 마무리되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면 깊숙이 숨겨진 자아와 만나고, 치유와 위로의 힘을 오롯이 느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쫓기듯 살며 스트레스를 외면해 왔던 지난 시간도 훌훌 털어 버리는 가슴 벅찬 경험이 되었다. 

  혼잡한 세상사로 탁해진 마음을 말끔히 씻어 주는 청아한 소리의 매력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싱잉볼 소리가 주는 감동과 여운이 이곳에 온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주변으로도 널리 퍼져 나가면 좋겠다.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치유의 소리가 귀에서 귀로 퍼져 나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온갖 번민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함께 행복한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 보인다. 밝아진 표정만큼이나 그들의 마음도 활짝 열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어두운 기억을 밖으로 몰아내었으리라. 심신에 촉촉이 녹아든 청아한 소리의 여음이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희망의 든든한 사다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뭉근한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조심스레 내려선다. 한 줄기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일상에서의 나의 소리를 떠올려 본다. 내 소리에도 싱잉볼처럼 맑고 따뜻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울림이 담겨 있는지. 혹여 도시의 소음처럼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부터는 싱잉볼처럼 온기를 가득 품은 소리로 일상에 지친 마음들을 다독이며 살아가고 싶다. 햇살처럼 따뜻한 울림이 담긴 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여음이 또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 그들의 삶을 더 온기 있게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행복감으로 충만해진 마음에 볕살이 다정히 스며든다. 싱잉볼 소리는 멈추었지만, 여음은 여전히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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