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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진 Jul 12. 2021

나의 고향은

내 사랑하는 집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큰 창이다.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볕 나지막한 동네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만약 창 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다.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다면 난 그곳을 '고향'삼고 싶다.   



내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보면 '서울'이나 고향의 또 다른 의미 '그립고 정든 곳'으로 여겨보면 보다 많은 장소가 있다.

기억 속 맨 처음 자리 잡고 있는 건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은평 아파트다. 

'1동 가에 102호' 아직도 주소가 기억난다. 이제는 철거된 곳이라 주소는 의미 없어졌지만 나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지형과 형태를 갖춰 자리 잡아 있다. 누나와 같이 쓰던 방과 거실 화장실 등은 어렴풋히 기억되는 반면 우리 집 앞 정원과 놀이터는 선명하다. 아마도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낸 까닭일 테다. 


   

처음으로 내 방을 가졌던 '로얄빌라 3차 207호' 역시 내 고향이다. 

이 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소리'이다. '계단을 올라오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나와 누난 윗집 아저씨와 아버지의 발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윗집 아저씨 발소리는 무겁고 둔탁한 반면 아빠의 발소리는 가볍고 조금 빨랐다. 아빠가 벨을 누르기 전 먼저 문을 열고 "다녀오셨어요?" 외치던 짧은 순간은 무척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방은 작았지만 대신 큰 창문이 있었다. 창을 열면 맞은편 빌라와 그 사이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내가 창문에서 나무가 보이는 집을 갖고 싶은 건 이때의 추억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방은 내가 사춘기를 보낸 방이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후 방 문을 닫거나 잠그고 지냈다. 가족과 대화는 끊기고 다툼은 잦았다. 엄마뿐 아니라 가족 모두와 그랬다. '날 제발 좀 내버려 둬'가 당시 내 삶의 모토였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은 모든 순간이 창피하지만 그중 가장 낮 뜨거운 건 방문에 크게 적은 'NO'라는 글자였다. 어떻게든 반항심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때라 'N'을 'И'으로 적어서 나중에 고친 기억이 있다. 얼마전 영화 '그것'을 보다가 깁스에 낙서 'Loser'를 'Lover'로 바꾼 것을 보면서도 이 방문 생각이 났다. 이 방에서 창밖을 봤던 기억은 이상하게도 낮보다 밤이 많다. 돌이켜보면 처음 이성친구를 사귄 것도, 헤어진 것도 모두 그 방에서 겪었으니 밤이 더 기억될만도 할 것 같다. 얼마 전 그 동네가 재개발이 들어간다는 기사를 읽고 철거되기 전 찾아가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세 번째 고향으로 기억되는 곳은 '강원도 화천군 **면 **리' 그러니까 2년간 군생활을 했던 부대이다. 왜 그립고 어쩌다 정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무척 애틋한 장소다. 

우리 막사 앞엔 커다란 평상 하나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군생활을 떠올리면 난 늘 그곳에 앉아있고 주위로 내가 2년간 보았던 풍경과 시간과 사람들이 마치 타임랩스처럼 흘러간다.

특히 해가 뜰락 말락 한 새벽 그 평상에 앉아있으면, 조금씩 어둠이 거치며 맞은편에 있는 산이 마치 신이 큰 붓으로 그림 그리는 듯 형태를 드러냈다. 무척 경이로운 장면이라 제대 후에도 꾸준히 떠올리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내 고향이라 느껴지는 곳은 지금 살고 있는 망원동 집이다. 올 해로 자취 10년 차. 그중 6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내 삶으로 쳐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꽤 길다. 아마 내가 첫 주소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이곳 주소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쉽게도 올해 이 집을 떠날 예정이다. 그동안 이사를 준비하며 일기에 썼던 글을 모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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