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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진 Aug 28. 2021

더하기와 빼기

내 사랑하는 집



 서른 살 이후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는 망원동 집, 그 중에서도 책상 앞이다. 촬영과 여행 가끔 있는 약속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주로 하는 일은 글쓰기와 사진 보정이지만 그 밖에도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식사 또한 이 자리에서 한다. 그래서 집을 구할 때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책상이 놓일 공간이었다.   



 집 구하기는 연애와 비슷한 면이 있다. 내 취향에 대해 잘 알수록 유리하며 경험이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 '경험'이란 건 결국 현실감각이니까. 나 역시 자취 초반엔 '혼자 사는 로망'에 취해 현실의 불편을 무시했던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엘리베이터 없는 6층 집을 한강이 보인다는 이유로 계약한 적이 있다. 그 집은 계단 숫자만큼이나 다른 문제도 많았다. 지금이라면 가장 먼저 리스트에서 제외할 집이지만 당시엔 한강이 그 모든 단점들을 만회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점은 단점이다. 이곳에 대해선(이하 합정동 집) 할 말이 많기에 이후 더 이야기할 것이다.    



 난 어떤 집을 가건 한쪽 벽면은 내 취향으로 채우려 노력한다. 좁은 공간에 생존에 필요한 가구와 물건을 꾸역꾸역 넣다가 보면 취향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저 생존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집은 한눈에 봐도 티가 난다. 집은 자고 먹고 씻고 쉬는 공간이지만 또한 한 개인의 정체성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벽 한 면이라도 취향 껏 꾸미려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리에 아끼는 책을 모아 꽂아 둘 때도 있고, 내가 찍은 사진이나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를 걸어둘 때도 있다. 지금은 이중섭 그림과 받은 편지 중 자주 읽는 걸 붙여놨다. 그 공간은 넓지 않지만 눈에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여유로와진다.



 나처럼 전세(혹은 월세)를 구하는 건 집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혼처럼 평생 함께하겠다는 서약 같은 건 필요 없다. 보통 2년짜리 계약서에 사인하면 되고, 살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 물릴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고 인생에서 끔찍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합정동 집이 그랬다.

 무엇보다 연애와 비슷한 건 정말로 설레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이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반대로 처음엔 별로였던 집이 볼수록 괜찮아서 계약할 때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망원동 집이 그런 경우이다. 중개사 실수로 한 번 보여줬던 집을 다음 날 다시 보게 됐는데 첫날엔 저녁에 봤고, 두 번째는 한낮에 봤다. 어두울 땐 좁아 보이던 방이 낮엔 넓은 창으로 햇살이 듬뿍 들어오며 환하고 예뻐 보였다. 만약 이 집에서 산다면 내가 좀 더 밝은 사람이 될 것 같단 예감도 들었다. 실제로 이 집에 산 6년간 내 성격은 좀 더 밝아진 면이 있다. 이런 좋은 집을 떠나는 건 6년 만에 주인아저씨가 전세금을 올린 까닭도 있고, 여기보다 조금 더 넓고 좋은 집에 가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집을 보러 가기 전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간략히 적어봤다. 10~15평 사이, 작업실에 커다란 창(바로 앞에 건물이 아닌 나무가 보이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라면 하늘이라도), 작업실과 침실 분리, 침실은 작아도 되지만 작업실은 큰 책상을 놓고도 공간이 여유로왔으면, 책만 읽는 자리가 따로 있었으면, 넓은 싱크대, 깨끗한 세면대와 변기, 집 양 끝에 창문이 있어 환기가 잘 됐으면, 지하철역이 멀지 않았으면, 계속 마포구에 살았으면 정도였다. 

 내가 가진 돈은 지금 전세금에 3배 정도 됐다. 6년 전 전세금이라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집을 못 구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신축빌라나 브랜드 아파트를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집을 찾으러 다녀보니 마포구에서 내가 갈 수 있는 집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있기 했는데 내가 원하는 집과 거리가 멀었다. 



 1달여간 집을 보러 다니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정말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고?'와 '이 집을 이 돈 주고 간다고?'였다. 

'작업 공간'은 커녕 내 몸뚱이 하나 겨우 누일 5평짜리 방은 풀옵션인걸 감안해도 2억이 넘었고, 조금 넓다 싶은 집은 구옥이거나 반지하였다. 곰팡이 배양소인 집도 봤다. 어떤 집은 불법건축으로 육각형 구조에 방마다 천장 높이가 달랐다. 칼리가리 박사도 어지러워 뛰쳐나갈 구조였다. 심지어 6.25 전쟁 이전에 지어진 단층집도 봤다. 망원유수지 쪽에 있던 이 집은 전쟁은 버텼지만 세월은 버티지 못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는데, 중개사 아저씨는 조금만 손보면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 집의 전세가는 1억 7천이었고 수리비 역시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난 진심으로 세상에 도둑놈이 많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며칠 뒤 집 구하기 어플에 들어가면 위에 언급한 집이 하나 둘 '계약 완료'로 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면 저들이 도둑놈이 아니라 내가 도둑놈 심보를 가진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이런 집들을 연속해서 보다 보니 내가 원하는 집이 있다는 게, 그러니까 취향이 있다는 게 우습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사회에서 소외된 느낌이 이런 거구나- 그 때 피부로 와닿았다. 이 기분은 정말로 좋지 않았다. '고작 집 때문에?'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집을 가지기 위해(정확히는 빌리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끌어 모아야 했다. 촬영을 해서, 글을 써서, 부모님께 빌려서 그 밖에도 현금, 적금, 여행마다 모아둔 달러까지.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게 곰팡이 핀 육각형 반지하라면 과연 누가 자존감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서울이란 도시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이미 몇 개의 점으로 찍혀 있었고 그 좌표엔 내가 원하던 집은 없었다.   

 이 시기 난 촬영을 나가는 게 너무 싫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뛰어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였다. 무기력과 짜증이 본질적으로 같은 감정이란 생각도 했다. 곰팡이로 덮인 침대에서 자는 악몽을 이틀 연속으로 꾸었을 때 난 집 보러 다니기를 잠시 멈추었다. 

집 구하기와 연애를 비유한 건 잘못이다. 연애는 포기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집은 그럴 수 없었다. 내겐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옵션이 있었지만 불과 2~3년 뒤만 생각 해도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난 이제 혼자 사는 게 행복하고 작업 효율도 가장 좋았다.


 앞선 글 '나의 고향은'에서 적었듯 집은 거주하는 곳이면서 또한 정서가 만들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정서는 수많은 것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집의 구조, 층수, 동네 소리, 현관문의 색깔, 창문에서 보이는 하늘과 노을, 놀러 온 친구들이 앉았던 의자. 먹었던 음식, 키웠던 식물, 사랑하는 하모가 누웠던 자리, 벽에 붙였던 포스터와 그 포스터 모서리가 낡아 헤질 때까지 시간처럼 여러 오감이 포개지며 정서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정서에 대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 공간에 담기고 키워질 정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빼기'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건 바뀐 상황에 맞춰 현실감각을 되찾는 일이었다. 우선 평수를 10평 이하로 줄였고,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 책은 침대에 누워 보기로 했고(하지만 언젠가는 꼭 독서만 하는 공간을 갖고 싶다), 싱크대와 화장실은 그냥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또 마포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던 건 넓은 작업공간과 나무와 하늘이 보이는 창문이었다. 사실 이 두 가지도 정 안되면 포기하자고 마음을 먹긴 했다. 포기하게 되면 슬플 테지만. 나는 다시 집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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