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편지.

시간

by 박원진

수영아. 왜 아침에 몸을 일으킬 때부터 내 몸이 이렇게 무거웠나 싶은 날이 있잖아. 오늘이 딱 그랬어. 그 무거운 걸 열댓 번은 뒤척인 다음에야 겨우 일어나 씻었고. 또 여행에 옷은 몇 벌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입는 옷마다 왜 모두 이상해 보이는지. 계속 갈아입다가 나중엔 짜증이 나서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어.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걸 겨우 골라 입고-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메는데 이게 원래 내가 쓰던 카메라가 맞나 싶게 무거운 거야. 오늘은 그냥 아이폰을 찍을까, 아예 사진도 찍지 말까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 그래도 좋은 장면을 만나면 어쩌나 싶어서 들고 나왔어.

게다가 오늘은 뭔가 한 박자씩 늦는 기분이 드는 날이야.
아침엔 일본인을 찾아갔는데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어. 결국 난 그의 이름을 묻지도, 사진을 찍지도 못했지. 그렇게 혼자서 아침을 먹었어. 그리고는 '띠보'로 가는 기차표를 사러 역에 갔었는데 내일 표는 이미 매진됐더라고. 역에 앉아서 모레 표를 살까 아예 다른 도시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표도 사지 않고 나와서 계속 걸어 다녔어. 원래 쉬기로 마음먹은 날이라 바쁠 게 없었고, 어디를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어. 근데 마음은 뭐가 불안하고 불만인지 계속해서 불평을 쏟아냈고 어느덧 그 불평이 온몸에 가득 차서 내 몸 어딘가에 구멍을 내서 빼내고 싶은 심정이었어. 아니면 내가 펑하고 터져버리거나.

사실 한국에선 이런 기분이 드는 날이 많아. 이럴 땐 잠시 멈춰 서 시간을 다시 세팅해야 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커피를 내리는 거야. 주전자에 물을 받고, 물이 끓는 동안 원두를 갈고-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끈 다음 온도가 조금 내려갈 때까지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기다려. 한 3분 정도 기다리는데 난 이때가 가장 좋아. 팔팔 끓던 물이 서서히 식는 걸 지켜보면서 내 안의 바쁜 마음도 같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거든. 드립용 온도계를 사면 이 과정은 없어지겠지만, 그냥 몇 분간 멍하니 있을 핑계를 만들 수 있어서 온도계 대신 이 방식으로 온도를 맞춰. 그렇게 물 온도가 어느 정도 내려가면 드립을 시작해. 원래는 물이었던 게 원두를 거치며 커피로 변하는 걸 보며 답답했던 내 시간도 필터를 거쳐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여기선 원두도 없고 그라인더도 없어. 게다가 미얀마에서 커피는 예전에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믹스커피'를 커피라고 부르더라. 여행에 온 뒤로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지 못했고 그래서 난 진짜 커피가 정말 정말 마시고 싶어.

또 다른 방법은 미장원에 가는 거야. 응 맞아. 난 요즘도 너랑 다니던 미장원에서 머리를 잘라. 이사를 가서 예전처럼 자주 가진 못하지만.(누나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 물어보셔.) 소파에 앉아 다른 사람들 머리 자르는 걸 구경하며- 누구네 딸은 공무원이 됐다더라, 누구네 아들은 고3인데 집을 나갔다더라 같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귀에 담아. 사람이 바뀔 때마다 그 사람을 닮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이는 걸 보고 또 빗자루질 몇 번에 그 많던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것도 지켜봐. 그리고 내 차례가 되면 자리에 앉아서 누나 잔소리를 듣지. 결혼은 안 하냐, 이제 돈은 좀 버냐, 지금 사는 곳은 월세가 얼마냐 같은 이야기를 한참 듣다 보면, 거울 속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아까보단 달라져 있어. 그리고 그 모습이 내겐 새로운 시작점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래서 여기서도 물어물어 이발소를 찾아갔는데 입구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니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안 나더라. 안도 살짝 엿봤는데 지저분한 건 둘째치고 부엌에서 쓸 법한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게 좀 무서워 보였어.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게 여행의 묘미라지만 오늘은 옷도 별로인데 머리까지 망치면 큰일이다 싶어서 포기했어.

정말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싶은 맘에 미장원 앞 도로에 걸터앉아 혼자 얘기했어.
"내가 오늘 아주 구린 거 잘 알아. 옷도 별로고, 일본인은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고, 기차표도 못 샀고, 기껏 찾아온 이발소는 부엌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 무거운 카메라도 왜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어. 전부 다 별로야. 내 몸을 펑!하고 터트릴 버튼이 있다면 지금 당장 누를 거야. 하지만 불가능하잖아? 만약 내가 원한다면 지금 바로 숙소로 돌아가 누워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정말이야. 하루 종일 잠만 자도 돼. 원한다면 발길이 닿는 아무 곳이나 걸어가도 돼. 귀찮으면 사진 안 찍어도 돼. 난 그냥 내 마음이 편했으면 해."

그렇게 할 말이 다 떨어질 때까지 떠들고 나니 마음이 조금 나아지더라. 생각해보면 여긴 서울도 아니고, 난 미얀마에 일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 누가 사진을 찍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내일 띠보를 못 간다 한들 여행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그냥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였고.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천천히 걸었어. 의식할 만큼 천천히. 그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니 앞에 재래시장이 나왔고, 시장을 둘러보고는 시장 바로 앞에 있는 골목으로 갔어. 그 골목을 나와서는 또 그다음 골목으로 갔고. 그렇게 걷다가 비가 와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비를 피했어. 볶음밥을 시켜 먹었고 다 먹은 다음엔 믹스커피를 주문해 마셨어. 덕분에 비 오는 날과 믹스커피의 궁합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됐어. 그렇게 비가 그칠 때까지 식당에 있다가 저녁이 되기 전 '우베인 다리'로 노을을 보러 갔어. 노을은 비 온 뒤가 가장 예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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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앉아 해가 강물 뒤로 완전히 잠길 때까지 노을을 구경했어. 태양이 강 쪽으로 내려올 때마다 하늘색이 계속 변했는데 크게 변한 색깔만 세어봐도 일곱 번이었고- 난 여섯 번째 색깔이 가장 좋았어. 하루가 완전히 캄캄해졌을 때 내 마음은 아침보다 한결 편안했어. 뭐랄까 늘 쫓거나 쫓기던 마음이 지금은 온전히 내 안에 있달까. 왜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손목시계의 시간부터 맞추잖아. 이 순간은 그때의 느낌이랑 비슷했어. 내 마음 안에서 어떤 난 한참 뒤처져있고, 또 어떤 난 저 멀리서 이미 실패한 꿈에 매달려 있어. 내가 사는 현재는 그 사이에 있어. ‘서울에서의 나’, ‘영화감독을 꿈꿨던 나’, ‘삼십 대의 꿈이 없는 나’는 모두 같은 사람이야. 그걸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난 미얀마를 여행 중이고 이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나야. 서울이었다면 오늘처럼 천천히 걸어다닐 수 있었을까? 이렇게 노을을 오래 바라볼 여유가 있었을까? 노을을 보며 앉아있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내 마음에 도착해서 지금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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