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
난 늘 산을 좋아했어. 서울에 살면서도 집 근처엔 산이 있었고,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하굣길 중 하나는 산을 통해 집으로 오는 루트가 있었어. 등교할 땐 30분이면 가는 길을 돌아올 땐 2~3시간이고 빙빙 돌아왔던 거지. 특히 난 산 입구에서 산으로 들어갈 때의 느낌을 좋아했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띠보를 좋아하는 건 이런 취향이 분명 작용했을 거야. 이곳은 도심의 작은 번화가를 제외하면 마을 전체가 산과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엔 애교점 같은 작은 개울도 있어. 심지어 폭포도 있다고 해.
게스트하우스 직원에게 띠보를 다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릴지 물어보자 그녀는 잠깐 고심하더니
“이틀이면 가능해. 하루는 남쪽 하루는 북쪽.”이라 대답했어.
내가 놀란 얼굴로 “그게 정말 가능해?”되묻자 그녀는 솔직히 털어놓겠단 표정으로
"사실 하루면 가능해. 오전에 남쪽, 오후에 북쪽. 그리고 밤에는 미얀마 맥주를 마시면 돼.”
잠깐 그녀에 대해 소개하면 샨족 출신에 이름이 ‘푸푸’야. 초롱초롱한 눈에 장난기 많고 밝고 당당해. 내가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장난을 거는데 내가 호수를 말하며 방 키를 달라고 하면 “are you sure?”라고 되물어. 이 호텔에 처음 온 날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내가 방 번호를 잘못 말했었거든. 그다음부터 계속 이런 장난을 쳐. 처음엔 나도 “Yes”라고만 대답하다가 이제는 “I’m not sure.” 하거나 일부러 틀린 방 번호를 말하기도 해. 그녀는 내가 이 숙소에 온 6번째 한국인이라고 했어. 고맙게도 그들 중 내가 가장 잘생겼다고 말해줬는데 <미얀마를 방문한 한국인들 중 오지라 불리는 띠보, 더하여 붉은용호텔에 숙박한> 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내가 가장 잘생긴 사람이 된 거지. 난 엄청 신나서 “그럼 6명이 다 남자였어?”라고 물었더니 푸푸는 웃으며 “아니. 4명은 여자였어.”라고 말하며 키를 건네줘. 우린 이런 식의 장난은 볼 때마다 해.
그렇다고 이곳 직원 모두가 친절한 건 아니야.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 호객행위를 했던 직원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내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하루에 두세 번은 마주치는데 계속 나만 인사를 하는 게 어색해서 이젠 나도 못 본척하고 지나가게 됐지. 목적을 달성 했으니 더 이상 친절할 필요가 없단 걸까. 아니면 원래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침식사 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음식을 나르면서 서양인들에겐 허리가 거의 100도로 휘게 인사를 하더라고. 미소도 얼마나 예쁘던지. 내게 판플랫을 건넬 때가 딱 저 미소였지 싶더라.
사실 여행하다보면 서양인에겐 친절하고 동양인에겐 불친절한 현지인들을 종종 보게 돼. 이건 아시아 국가에 고루 퍼진 풍토인데 아마 한국도 예외는 아닐 거야. 만약 한국 식당에 훤칠한 키에 잘생긴 프랑스인과 나처럼 늙고 실패했고 추리한 중국인이 동시에 들어왔다면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심지어 이런 시류에 동참해 자신이 서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방을 떠는 여행자들도 있어.(그게 그들이 아시아로 여행 오는 재미겠지만.) 보통 나이가 매우 어리거나 매우 많은데- 이런 태도는 내게 몹시 불쾌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져. 서양인이라고 해서 돈을 더 많이 내는 것도 아니고 더 청결하거나 더 좋은 매너를 가진 것도 아니거든. 그들은 그저 다른 피부색을 갖고 태어난 것뿐이야. 일정 부분 교육의 문제고, 역사적 심리문제야. 하지만 무엇보다 인성의 문제라고 생각해.(난 과거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를 방문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저 직원 한 명으로 띠보 전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잖아. 그러기엔 이곳은 내게 최적화된 도시처럼 매 순간 안정감을 느끼게 해줘. 그리고 이 '안정감'은 내가 정말로 오랜만에 경험해보는 느낌이야. 지금 편지를 쓰면서도 이 단어가 편하고 좋아서 몇 번씩 혼자 발음하고 있어. 그런 이유로 푸푸 말대로 하루면 다 돌 수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난 벌써 4일간 머물고 있어. 지금 봐서는 일주일? 혹은 열흘 이상 있지 않을까 싶어. 심지어 미얀마의 남은 일정 모두를 이곳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어.
내 일과는 매일 비슷하지만 또 달라. 보통 아침식사를 하고 밖에 나와 방향 한 곳을 정한 뒤 지도를 보며 그 길이 끝날 때까지 걷거든. 걷다가 그늘이 있으면 쉬고,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강이 나오면 물속을 구경하거나 발을 담그고, 또 걷고 쉬고 사진을 찍고. 그러면 어느덧 해가 기울어있고 노을까지 찍고 나면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패턴은 비슷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다르고, 미소가 다르고, 하루의 온기가 달라. 무엇보다 내 상태가 달라. 난 여기서 하루하루 더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
그렇게 며칠을 지내면서 이곳이야말로 내가 스마트폰 지도에 의존하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란 확신이 들었어. 무슨 말인가 하면 미얀마를 여행하는 동안 난 이동하는 시간 대부분을 아이폰에 고개를 묻고 지도 속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만 쫓아다녔거든.
이 작은 마을에서도 거의 20~30분마다 지도를 확인했고- 그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어. 또 스스로 살짝 모자란 사람이란 인상도 받아.(모자란 게 맞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길치고 한 번 갔던 길이 익숙해지기까지 남들보다 몇십 배의 시간이 필요하잖아.
하지만 띠보는 달랐어. 우선 다른 지역보다 범위가 훨씬 좁았고 동쪽에는 ‘마이인지 강’ 서쪽에는 ‘철도’라는 절대 끊길 수 없는 구획이 그어져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이상 국제 미아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지. 게다가 강에서부터 철길까지 거리가 2~4km 정도이니 이 정도면 시도해볼만했어. 내가 이런 도전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마도 이곳이 내게 너무 편안함을 주고 있기 때문일 거야. 누군가에겐 이 도전이 별거 아니게 보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정말 오랜만에 목표가 생긴 거야. 그러니까 내일은! 스마트폰 지도 없이 여행을 해볼 생각이야. 수영이 네가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지금 내 계산에 ‘남과 북’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