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편지

새해 인사

by 박원진

수영에게.

새해 첫날부터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게 맘이 불편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털어놔야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아침에 숙소 직원과 싸웠고 결국 지금은 다른 호텔에 와있어. 이 일의 시작은 새벽이었는데 띠보는 5일마다 밤 시장이 열리거든. 새해 첫날 새벽 촬영을 하면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새벽 3시에 일어나 로비로 갔어. 여기 숙소가 밤엔 문을 잠그는 걸 알기에 전날 사장님과 푸푸에게 미리 말을 해놨었어. 오늘 당직은 전에 얘기했던 불친절한 직원이었는데 몇 번 불러도 안 일어나다가 잠결인지 밤 시장은 다섯 시에 여니 그때 다시 내려오라는 거야. 어제 사장님은 4시 전엔 가야 제대로 볼 수 있단 얘기를 들은 터라 "난 지금 나가겠다 문 열어달라" 말했고 그녀는 일어나면서 딱 한마디를 했어.

“Fuck!”


너무 황당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더라. 잠깐 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물쇠를 여는 그녀에게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물으니 그녀는 "아니야 혼잣말이었어.”하더라고. 그러니까 이게 내가 새해 첫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들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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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과는 다르게 새벽시장은 멋있었어. 다들 촛불과 LED스탠드로 자기 구역을 밝혔고, 그런 가게가 50미터가 넘게 길게 늘어져 있었어. 가로등도 드문 이 도시에 골목 하나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무척 신비로워 보였고 동화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어. 난 오랜만에 50mm 단렌즈를 꺼내 촬영했고. 하지만 이 멋진 곳을 촬영하는 내내 그녀의 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게 사실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런 부당한 상황은 내게 무척 익숙해.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는 게 익숙한 거지. 네가 아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 역시 독립영화일을 하며 생긴 버릇일지도 몰라. 나도 이전엔 이런 기억이 별로 없다가 영화일을 시작한 뒤로 엄청나게 늘었거든. 나도 처음엔 그런 순간마다 싸웠어. 하지만 그러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뒷얘기와 불이익이 따랐고(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정말 하찮지만 그땐 그게 크게 느껴졌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동글동글 해지는 길을 택했던 것 같아. 윗사람들이 손에 쥐기 쉽게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팔다리도 오므린 거지.

원래 얘기했던 페이와 다를 때도, 말도 안 되게 긴 시간을 촬영할 때도, 심지어 촬영 중 차사고가 났을 때도 "네 괜찮아요.” “뭐 어쩔 수 없죠.” “네 알겠습니다.”를 관성처럼 말하는 사람이 됐어. 모든 독립영화인이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내가 그런 거지. 이럴 때마다 혼잣말로 하는 전용 멘트도 있어. "그냥 똥 밟았다고 치자.”

나도 이게 찌질한 선택임을 알아. 그러니까 아까 같은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Are you talking to me?” 였던 거지.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 시장 촬영을 하는 동안 그녀의 말이 여러 번 떠오를 때도,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시장이 5시에 문을 닫는 걸 보면서도, 난 이미 지난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 생각했어. 그냥 넘어가는 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편한 길이니까. 그냥 전제 하나만 달면 돼.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전제.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게 되지 않았어. 시장이 파하며 불빛들이 꺼지는 걸 보면서 그와 반대로 먼 하늘에서 올해 첫 아침이 서서히 일어나는 걸 보면서 내 마음은 계속 불편했어. 마치 눈앞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지나듯 아까의 장면 위로 과거의 비슷했던 순간들이 계속 지나갔어. 그때 느꼈던 억울함, 화남, 그러다 결국은 그냥 넘어가자 타협하고 체념하는 당시의 내 표정이 지금의 나와 선명하게 겹치더라. 솔직히 이 순간에도 난 속으로 "아이고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자"를 계속 말했어. 뭐 어쩌겠어? 이미 지난 일인데. 따졌으면 아까 따졌어야지. 근데 이상하게 난 그녀가 내게 했던 욕보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던 “You talking to me?”가 더 마음에 걸렸어.


난 왜 그 말을 했을까? 이건 너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대사고, 우리가 장난으로 또 진지하게 수십 번 따라 했던 대사이기도 해. 내가 입버릇처럼 나중에 내 영화에도 이런 명대사 하나를 꼭 만들거라 했던 대사고, 네가 놀리듯 주어만 바꿔서 내게 장난쳤던 대사면서 내가 적어도 수백 번은 돌려보았던 장면의 대사야. 도대체 난 왜 그 상황에서 그 대사를 써버린 걸까? 뭔가 내겐 너무 신성시되던 대사를 나의 가장 찌질한 순간에 내뱉어 버린 게 정말 화가 나고 불쾌해. 내속이 이렇게 부글부글 끓는 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너와의 추억 때문인지, 단순히 쌓고 쌓다가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어 무너지려는 내 찌질함의 역사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뭐가 됐건 난 이 순간에 대해 “컷"을 외치고 싶었고 그래서 이번엔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먼저 말하지만 내가 숙소로 돌아가 한 일은 트레비스처럼 한 손엔 스미스 38 구경, 다른 손엔 매그넘 44를 들고 악당들 머리를 정조준하는 그런 멋진 시퀀스가 아니었어. 수영아 화도 내본 사람이 잘 내는 거더라. 호텔 입구에서부터 엄청 떨리고 그 직원 앞에 가선 어버버 겨우겨우 입을 떼고. 그러다가 그 직원이 약 올리듯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를 시전 하는 순간 갑자기 주위 모든 소리가 오프 되면서 머리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어. '오늘은 내가 똥이 되어야겠다.'

그러고 나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지랄과 진상을 다 피웠어. 결국 기억이 나지 않는다던 그 직원은 "정말 미안해"로 말을 바꿨고 사장님도 나와서 그녀와 같이 다시 사과를 했고, 사과의 뜻으로 숙박비를 돌려준다고 했지만 난 받지 않고 짐을 싸서 다른 숙소로 옮겼어.


지금 편지를 쓰는 이 숙소는 붉은용호텔보다 더 비싸고 더 오래됐고 더 더러워. 바닥과 천장이 나무로 돼있고 곰팡이 냄새가 많이 나. 이게 왠 사서 고생인가 싶은 생각도 들어. '맨날 똥 밟는 사람이었다가 스스로 똥이 돼보니 마음이 정말 편해'라고 쓰고 싶지만 솔직히 마음이 불편한 건 엇비슷해. 그저 후회되는 게 조금 덜한 기분이야. 무엇보다 내가 너무나 좋아한 이 도시,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라 여겼던 이곳에서 그것도 새해 첫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가장 마음을 불편하게 해. 그래서 너에게 무작정 편지부터 썼어. 말하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까 싶었는데 솔직히 아직도 편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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