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편지

다 지나가요 괜찮아요

by 박원진

수영아. 기본적으로 난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어.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편안한 사람이고 싶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닮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누군가가 날 만만하게 보는 건 원치 않아. 내게 욕을 한 직원은 전에도 얘기했듯 다른 손님에겐 과할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었어. 그런 그녀가 나에게만 그렇게 행동한 건 어느 정도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거야. 그 직업을 가진 그녀가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문제가 있단 생각을 해.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그런 욕이 자연스럽게 나왔겠어. (그녀는 나중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한 실수라고 말했어) 하지만 돌아보면 난 스스로에게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할 때도 많아. 이름 부르듯 스스로를 실패한 영화인으로 부르고, 거의 매일같이 악몽을 꾸고, 인생의 리셋 버튼을 찾고 누가 봐도 매력 없고 누가 봐도 만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사실이지. 내가 날 대하는 이 태도가 분명히 외부로도 표출됐을 거라 생각해.


지금 시점에선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오늘은 하루 종일 눈에 힘을 팍주고 같은 여행자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끝까지 째려보고 다녔어. 웃긴 게 숙소 앞에서 그렇게 잔뜩 성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아저씨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혹시 한국인이세요?” 물어보더라. 난 깜짝 놀라서 “맞아요." 했지. 여행 와서 만난 첫 한국인을 이런 순간에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 아저씨는 자기도 이 숙소에 묶고 있다면서 지금 저녁 먹으러 나가는데 같이 가자 하셨고 내가 거절하자 그럼 밤에 술 한잔 하자고 하셨어.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밤이 되면 다른 핑계를 대고 방에서 숴야겠다고 생각했어. 누굴 만나 얘기하고 싶지 않았거든.


카메라를 들고 해가 질 때까지 걸었어. 이 작은 동네를 참 많이도 걸어 다녔구나 싶게 안 가본 골목이 없더라. 오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이 도시를 미워하기엔 띠보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고 내가 이 도시로부터 받은 게 많았어. 감정의 무게로 볼 때 오늘 느낀 불쾌감보다 이곳에서 느낀 안정감- 따뜻함- 편안함은 비교할 수 없이 컸어. 그렇게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그 아저씨가 아까 내가 서있던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더라. 신기하게도 내 옆방에 머물고 계셨고 결국 테라스에서 같이 맥주를 마셨어.


자기를 '울릉도 불독'이라 소개한 아저씨는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었어. 날 편안하게 대해주셨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내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배울 점을 찾아낼 줄 아는. 울릉도에서 관광업을 하셨고 매 겨울마다 2개월씩 여행을 다니신다고 했어.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나라를 다니셨더라고. 아저씨는 취미로 사진도 찍으셨는데 내게 기술적인 부분을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나도 기분 좋게 알려드렸어.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아저씨가 아까는 왜 그런 표정으로 숙소 앞에 있었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얘기를 쭉 해드렸어. 아저씨는 묵묵히 다 들으시고는 "아 그 사람 참 나빴네."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나선 "원진씨 여행이란 게 항상 좋은 순간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전 원진씨보다 영어도 못하고 나이까지 많으니 억울한 상황이 정말 많아요. 유럽에선 거의 10배가 되는 가격에 식사를 한적도 있어요. 전 그럴 때 원진씨처럼 따지지도 못했어요. 그래도 제가 계속 여행을 다니는 건 안 좋은 경험에서도 배우는 게 있어서예요. 전 원래 영어는 헬로우 밖에 할 줄 몰랐는데 이젠 좋다, 싫다, 닥쳐 정도는 할 줄 알거든요.”라고 말하며 찰지게 영어 욕을 하셨어. 내가 웃으니까 아저씨도 웃으시며 짧게 말을 이으셨어. “다 지나가요. 괜찮아요”


아저씨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서 어떤 큼지막한 게 쓱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어.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늘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고, 내가 의지하고 믿고 싶었지만 결국은 믿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어. 그걸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들으니 마음이 아팠어. 스스로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그 아저씨가 내게 해 준 건 ‘위로’ 였어. 스스로에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위로. 오늘 같은 날에도 내게서 문제를 찾고, 스스로를 혼내고, 현재의 나를 미워하는 내게 필요했던 건 그냥 "괜찮아."라는 짧은 말이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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