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망
수영아 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
나는 여전히 띠보에 있고 이곳에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걸 무척 감사하고 있어. 내겐 이 도시 전체가 따뜻한 이불 속같이 느껴져.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포근하고 안정감을 느끼거든. 이곳은 내년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내게 “그게 뭐 큰 문제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맞아 그게 뭐 대수야!”라고 혼잣말을 하게 돼.
솔직히 이곳은 내 ‘도피처’이기도 해. '도피처'라는 어감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난 늘 쫓기다가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숨 다운 숨을 쉬고 있으니 도피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아. 매일매일을 이렇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과 함께 자연스레 내가 미얀마에서 머물 수 있는 날짜도 같이 헤아리게 돼. 시간은 정해져있고 또 계속 흐르고 있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내 손목시계에서 보고, 달력에서 보고, 나를 통해서도 봐. 아침에 거울 앞에 설 때면 난 늘 ‘늙음'과 마주치거든. 이 늙음은 정말 ‘불현듯' 찾아왔는데 이건 ‘불현듯’이란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주위 사람들이 건강 보조제를 먹고, 보톡스를 맞고, 나이 듦을 한탄할 땐 그저 남 얘기로 만 듣다가 어느날 거울 앞에 서보니 나도 그렇게 늙어있던 거지. 너무 극적이라 영화처럼 거울 아래로 '몇십 년 뒤’라는 자막을 넣고 싶을 정도였어.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난 훨씬 건강하고, 젊고, 지금의 얼굴보다 예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현실의 난 그렇지 않아.
돌이켜보면 어릴 땐 놀라울 정도로 늙음에 대해, 죽음에 대해 무지했어. 오히려 죽음을 만만하게 보고 나도 '커트 코베인'처럼 '27살에 모든 걸 다 이루고 죽을 거야!’라고 말한 적도 있어. 근데 지금은 내가 27살에 무엇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
띠보에 있으면서 유독 어린 시절을 많이 생각하게 돼. 어릴 땐 자면서 자주 쥐가 났었거든. 그때마다 엄만 내 다리를 주무르시며 내 키가 크고 있는 거라 말씀하셨어. 내 코밑으로 까칠한 수염이 띄엄띄엄 올라온 날도 기억해. 처음 여드름이 핀 날 거울 앞에 선 내 얼굴과 그때의 느낌도 선명히 기억나. 무엇보다 그 당시의 내가 어떤 꿈을 꿨고 또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어. 그땐 모든 게 이뤄질 것 같은 시간에 살았었거든. 두려움의 무게보다 기대의 무게가 더 컸고, 그래서 새해에 한 살 더 먹는 게 그렇게 좋았어. 그 한 살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늘어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더하기’가 아닌 ‘빼기’로 느껴져. 이것도 빼고, 저것도 뺀 뒤 최소한의 희망만을 축약해서 한 해를 계획하고 그것마저도 과연 이뤄질까? 염려해. 가능한 일에 비해 불가능한 게 너무 많아졌고, 희망이란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며 쉬는 한숨 한 번에도 날아가 버려. 또 내가 지금 어깨에 지고 있는 게 희망의 무게가 아니라 두려움의 무게라는 것도 알게 되고. 이제 거울 앞에 선 나는 여드름 대신 늙음을 봐. 내가 생각하는 난 아직 어른이 아니거든. 근데 늙어버린 거지. 무엇보다 거울 앞에서의 불행은 지금 이 모습이 내가 떡국을 먹으며 꿈꿨던 모습이 아니라는 거야. 만약 내 삶에도 아이폰처럼 공장초기화 버튼이 있다면 솔직히 난 그 버튼 앞에서 망설일 것 같아.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이었고 다시 처음 여드름을 확인하던 거울 앞으로 돌아가서 '아 꿈이라 정말 다행이다.’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이 의미 없고 날 좀먹는다는 걸 알지만 한없이 이어지는 날도 있어.
오늘은 엊그제 폭포에서 돌아올 때 봤던 무덤가를 다시 가봤어. 그땐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 내가 묘지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의 관이 묻히고 있었어. '저 사람은 하루만 더 살았다면 한 살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혼잣말을 하다가 그게 어떤 의미일까 여러 번 생각했어. 이곳의 무덤과 비석의 모양은 각기 다 달라. 어떤 무덤은 무척 웅장하고, 어떤 무덤은 놀이공원에 있는 자동차 모양을 하고 있고, 비석조차 세우지 않은 무덤도 있어. 어찌 보면 각자의 삶이 달랐듯 돌아가는 자리도 다른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어. 나도 내 무덤의 모양을 한 번 그려봤는데 너무 못 그려서 차마 보여주진 못하겠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옆으로 어린 동자승 무리가 지나가더라고. 그것도 너무 즐겁게. 저 아이들에겐 이 공간이 놀이터 같아 보였어. 막 무덤 위를 뛰어오르고, 비석 사이로 술래잡기를 하고. 왜 ’천진하다'라는 말이 있잖아. 딱 그 느낌이었어. 노을 질 시간까지 겹쳐서 내가 환상을 보고 있나 느껴지기도 했어. 그렇게 아이들 사진을 여러 장 찍었어.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그 사진들을 보며 네게 편지를 써.
수영아. 이 아이들은 비석보다도 키가 작아. 난 그게 부러워. 하지만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간다 한들 뭐가 크게 달라질까? 언제 가는 비석보다 키가 커지겠고, 어느 날부턴 무덤 위로 오르지 않게 되겠지. 반대로 내 키가 더 클 수 없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까- 지금의 내 위치는 오늘 관속에 들어가던 누군가와 무덤 위에서 뛰어노는 저 아이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저 아이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직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난 이 사진이 내가 올해 찍은 가장 좋은 사진이라 생각해. 그래서 네게도 보내. 네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이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도 저렇게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건 내가 다시 영화를 찍는다거나, 초기화돼서 과거의 거울 앞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훨씬 쉬운 일로 느껴져. 그래서 새해 목표는 저런 표정을 한 번이라도 지어보는 걸로 정했어. 응원해줘.
P.S 그리고 이건 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시야.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