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층
수영에게.
수영아 나는 조금 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인레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지금 정류장 앞으론 막 노을이 지기 시작했는데, 보통 때였다면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녔겠지만 오늘은 너에게- 띠보에서의 마지막 편지를 쓰기 위해 정류장에 앉았어. 바람이 선선하니 좋아.
늘 그렇듯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여. 띠보는 이제 '내 동네’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숙하지만 막상 떠나는 사람이 돼서 바라보니 새롭게 보이는 게 많아. 아침마다 산책하던 강가의 물결은 이전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는 듯 보였고, 매일 지나던 골목의 담장이 오늘따라 낮아 보이기도 했어. 그 담장 뒤로 사람이 산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 장소와의 헤어짐은 사람과의 헤어짐과도 닮아서 막상 헤어질 순간이 되니 눈에 더 많은 걸 담고 싶어지고, 더 가까이 다가가 작은 부분까지 느끼고 싶어져.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큰 나무도 직접 만져보고 촉감을 마음에 담은 다음에야 걸음을 옮기게 돼.
오늘 산책엔 재밌는 일도 있었는데 시작은 이 골목이었어. 차 한 대가 못지 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었지만 양쪽으로 나무가 자라 골목 벽면에 예쁜 그림자가 드리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자가 사뿐 거렸어. 이 순간 이 골목으로 누군가가 지나가준다면 괜찮은 사진이 나올 것 같아서 위치를 잡고 기다렸어.
사진을 통해 배운 게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기다리는 거야.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고 서있는 건 보통은 지루한 일이지만 여기서 오는 재미도 있어. 이 장소만 해도 처음엔 벽면의 그림자만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벽에 낙서를 발견하게 되고,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며 이 골목을 주로 지나다니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게 돼.
이렇게 아무도 없는 빈 골목에 서있는 건, 흰 도화지에 무엇을 그릴지 상상하는 일과도 비슷해.
'동생 손을 꼬옥 잡은 아이가 지나가면 어떨까? 아이 둘의 키 차이가 얼마 안 나면 더 따뜻한 사진이 되겠군’,
'고양이 한 마리가 휙 지나가도 좋겠다! 내가 포커스를 잘 맞출 수 있어야 할 텐데’,
'탁발을 하는 스님의 무리가 지나가면 정말정말 행운이겠고- 그럼 난 그들의 앞모습을 찍어야 할까? 아니면 뒷모습? 뭐가 더 이 골목과 어울릴까?'
이렇게 빈 골목에 누군가를 채워 넣으며 시간을 보내. 솔직히 상상한 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약속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오길 기다릴 때처럼 설렘이 있어. 하지만 이 골목은 신기하게도 30분 동안 새 한 마리 날아오질 않았어. 오늘은 시간이 여유 있는 날도 아니어서 점점 초조해질 때쯤 멀리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어. 하지만 얼마 안 가 목소리는 다시 멀어졌고 그 순간 다른 사람을 더 기다릴까? 아니면 저 아이들을 따라가볼까? 망성이다가 이 골목에 다시 돌아오더라도 우선 따라가보기로 했어.
그곳엔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달리고 있었어.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예뻤지. 게다가 아이에겐 멋진 모자를 쓴 친구도 있었어. 내가 아이들과 한창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왼쪽 아이의 아버지가 다가오시더니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어. 난 당연히 따라갔지.
이곳은 아저씨네 집 거실인데 여러 장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한쪽을 벽면을 채우고 있었어. 서툰 영어로 이 애가 내 딸이고 지금은 양곤에서 공부하고 있다며 자랑도 하셨고, 아내의 사진,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어.
이럴 땐 기억이란 게 꼭 과거의 것은 아닌듯해. 지금의 아저씨 모습은 사진속 젊은이와는 많이 다르지만, 내가 보고 있는 저 얼굴은 수많은 기억이 지층처럼 쌓여서 하나의 표정이 된거잖아. 순간 저 아저씨의 얼굴엔 아내도 있고 양곤에 있는 딸도 있고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까지 많은 시간이 쌓여있구나 싶어서 아저씨 얼굴을 찍었어. 언젠가 띠보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기면 전해드려서 저 벽에 같이 걸면 좋을 것 같아.
아저씨의 표정 때문인지 어제 쓴 편지가 마음에 걸렸어. 사실 오늘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던 건데 날 움직이는 건 꼭 후회의 기억만은 아니야. 짐이라 불릴지라도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억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영화를 찍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이 나쁜 건 아니었어. 무엇보다 난 엄마랑 같이 영화를 찍었잖아. 그건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라 생각해. 매 장면을 찍을 때마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 엄마가 했던 대사, 그리고 카메라에 찍힌 엄마의 여러 얼굴을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 저 아저씨가 사진을 바라볼 때의 표정으로 그 기억을 바라보기도 해.
수영이 너와의 기억도 그래. 우리가 고등학교 때 6mm 카메라를 들고 공포영화를 찍겠다며 산에 올라 난리를 치던 때 역시 이곳에 와서도 몇 번씩 꺼낸 본 기억이야. 비록 어두워서 테입엔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지만, 내가 ‘영화’란 단어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그 테입에 녹화된 '검은 화면'이기도 해. 그리고 그 위로 내가 띠보에서 본 강가와 옥수수밭, 농부아저씨와 시장 아줌마, 오늘 만난 아저씨와 아이들의 미소 하나하나가 지층처럼 쌓여서 어느 순간에 하나의 표정으로 내 얼굴에 드러나리라 예감해.
난 지금 버스 안에 있고 노을이 지나간 거리엔 어둠이 앉았어. 인레에는 내일 새벽 5시에 도착할 예정이야. 숙소를 잡으면 다시 편지를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