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워지기까지의 시간
수영아, 난 무려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인레에 도착했어. 띠보에서 인레까지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과 비슷하지만 도로시설이 좋지 않고 샨주(Shan State) 대부분이 고산지대의 험난한 길이라 훨씬 오래 걸렸어.
내가 있는 ‘인레 호수’역시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산속에 있는 호수란 점에서 한국의 ‘산정호수’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는 인공으로 만든데 비해 이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호수야. 그러니까 이 산속으로 물이 고이고, 그 고인 물이 호수라는 형태를 띠기까지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을 지나온 거지. 이렇게 상상하기 힘든 것을 상상할 때 느껴지는 아뜩함이 있잖아. 거대한 시간의 크기가 온몸을 누르면서 내가 티끌처럼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란 존재도 그런 긴 시간을 거쳐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하고 신비한 감정에 휩싸이게 돼. 그런 까닭에 내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충분한 시간을 거쳤다'로 읽히기도 해.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일,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내는 일, 사람이 늙는 일 모두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일이고, 그 안엔 겪어야 할 ‘시간'이 있잖아.
사진도 그래. 내가 누군가를 찍어야겠단 느낌을 받을 땐 그 대상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거든. 아까 산책을 하다가 만난 밭에서 일하는 부부도 그랬어. 그 부부는 별다른 대화 없이 밭에 모종을 심고 있었는데 마치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보폭, 같은 속도로 움직였어. 두 분은 모종을 심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피고 다시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히기를 반복했고- 내겐 그 모습이 하나의 리듬처럼 느껴졌어. 두 분이 같은 모양의 음표처럼 보이기도 했고. 같이 살면 닮는다는 건 꼭 얼굴만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서로를 바라보고 배우고 또 맞춰가면서 모든 면에서 조금씩 비슷해지는 것 같아. 물론 여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곳에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10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어. 하지만 그중에서 자연스럽다고 부를 만한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아. 늘 느끼지만 누군가를 찍는 건 어려운 일이고 자연스러운 순간을 담는 건 더더욱 어려워. 그나마 내가 아는 방법은 그 사람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야. 다가가서 괜히 이것저것 물어보고, 상대방이 경계를 풀게끔 낮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어떨 땐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똑같이 따라 하기도 해. 무엇보다 그 사람의 일에 대해 아낌없이 존경심을 표해. 그게 모종을 심는 일이건, 물고기를 잡는 일이건 상관없이 말이야.
안타깝게도 이렇게 한다고 해서 모두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건 아니야. 아까 만난 모종 심는 부부만 해도 결국 사진 촬영을 거절하셨으니까. 솔직히 난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이 부족해. 내가 생각하는 프로의 모습은 멋지게 다가가 "안녕하십니까 당신 아주 멋지시군요.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당당한 모습인데, 현실의 난 저 먼발치에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쭈뼛쭈뼛 걸어가 어색하게 말을 걸고 맨 마지막에서야 겨우 "사진 찍어도 돼요?” 물어보거든. 아마도 이건 내가 사진과 보낸 시간이 부족한 탓일 거야. 그렇다고 프로인 척 과장되게 행동하는 건 더 부자연스러울 걸 알기에 부족하더라도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이런 모습도 쌓이다 보면 무엇인가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고.
그래도 오늘은 운 좋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찍었어. 난 이 사진이 오늘 찍은 것 중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너한테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어. 사실 이 사진에서 내가 일부러 무언가를 한 건 하나도 없어. 난 저들에게 안정된 삼각형 모양으로 서달라 부탁하지 않았고, 각자 다른 행동을 취해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그저 운 좋게 이런 모습이 찍히게 된거야. 이렇게 마음에 드는 사진이 생기면 잠들 때까지 계속 보고 있게 돼. 그러면서 내일도 이런 사진을 딱 한 장만 더 찍게 되길 소망하게 돼. 이왕이면 이번엔 운이 아니라 실력이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내일은 자전거를 빌려서 호수를 둘러볼 예정이야. 다녀와서 다시 편지를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