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편지

4000분에 1

by 박원진


내가 사진을 못 찍는 건 운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실력이 부족해서일까?
뭐가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괜찮은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어. 3891장. 오늘 내가 찍은 사진의 장수야. 이런 날은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아.
여행이 나쁜 건 아니었어. 좋은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어. 원래 그 이야기를 편지에 쓰고 싶었는데, 막상 숙소로 돌아와 사진을 리뷰해보니 그 좋았던 기억들이 다 의미 없어지는 것 같아. 고작 사진 몇 장으로 하루의 의미가 뒤바뀌는 게 어이없지만 어쩌겠어. 내 마음의 비중은 이게 더 커. 사진과 나를 동일시하는 게 문제란 생각도 들어.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나란 존재를, 그 가치를(외적이건 내적이건) 증명할 방법은 이 일 밖에 없고 그러기에 내가 여기에 매달리는 건 당연하다 생각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처음부터 안되는 게 아니라 왠지 될 것 같은데 안될 때야. 불가능한 일이면 진즉 포기하면 되는데 이 일은 왠지 될 것 같거든. 정말로 될 것 같아. 이 자리에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다른 배경으로 살짝만 옮기면 그 인물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마음속에서 그린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는 미세하게 달라. 그 미세한 다름이 날 괴롭게 하고. 기계 탓하는 게 가장 바보 같은 짓인 걸 알지만 이놈의 캐논 카메라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핀이 나가는 기능이 있는 건지, 마음에 든다 싶어 확대해보면 어김없이 핀이 나가 있어.


수영아 넌 ‘운'을 믿어? 보통 난 하루에 1000장 정도의 사진을 찍거든. 운이 좋으면 그중 괜찮은 게 1장은 나와. 오늘은 그 4배 가까이 찍었는데도 좋은 사진을 건지지 못한 건 내가 운이 없기 때문인 걸까? 내가 원하는 건 ‘1000분에 1'이란 확률을 '1000분에 3'이나 '1000분에 5'로 올리는 게 아니야. 난 날마다 1장의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루에 딱 1장.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그걸 ‘운'이라 부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진심으로 이 부분에 있어서 난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운이라 부르는 순간 다른 무언가의 영향을 받는 기분이 들거든. 난 ‘실력'을 원해.

"운이 좋았어요.”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미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제가 잘해서 그랬어요."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운은 최고의 변명거리거든. 난 예술작업에 있어 ‘운'은 없다고 생각해. 물론 시대적인 운도 있고,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의 운도 필요하지만 그것의 밑바탕은 결국 실력이고 노력이거든.


같은 의미에서 난 재능도 믿지 않아. 영화 일을 할 때 난 스스로가 재능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너도 이제 알잖아. 그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야. 그 이후로 난 더 이상 재능에 의지하지 않아. 오히려 내가 아예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100장 찍을 걸 1000장 찍게 되거든. 많이 찍는다고 좋은 사진을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이 일에 애쓰고 있단 느낌이 들고 그 느낌은 내게 안도감을 줘. 좌우, 앞뒤, 위아래 내가 찍을 수 있는 모든 자리에서 셔터를 누른 다음에야 다음 장소로 넘어가게 돼. 무식한 방법인 거 알아. 하지만 무식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미얀마에 오기 몇 달 전에 한 기업이 후원하는 아이들 행사를 촬영한 적이 있는데, 이벤트로 마술사가 왔었어. 마술사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몇 가지 마술을 보여줬는데 그중 내가 감동받았던 건 빈손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마술이었어. 마술사의 손짓은 정말 우아했어. 부드럽게 손바닥을 접었다 피면 그때마다 장미꽃이 나타났다가 또 금세 사라졌어. 단순한 게 아름답다는 걸 난 그 마술사의 손을 통해 느낄 수 있었어. 그날 촬영에 가져간 카메라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핀이 나가는 이 카메라였는데 난 그 마술사의 트릭을 결국 찍지 못했어. 내 카메라는 4000분에 1초까지 찍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1초를 4000번 나눈 시간보다 그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인 거지. 그렇게 우아한 손짓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또 핀을 못 맞춘 걸 수도 있지만) 난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과하게 많이 찍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마술사를 떠올려. 그에게도 이런 헛손짓의 시간이 있었을 거라 믿으면서.

내가 사진을 못 찍는 건 운이 없어서,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저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믿고 싶어. 이렇게 여기는 게 나에겐 위안이 돼. 다른 두 가지는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실력은 아직 내 몫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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