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수영에게.
나는 지금 태국 돈므앙 공항에 있어. 딱딱한 공항 의자에 누워있으니 예전에 너랑 뉴델리 공항에서 노숙하던 게 떠오르더라.
내가 게스트하우스에 지갑을 두고와서 다시 돌아가고(차가 정말 미친 듯이 막혔지) 결국 비행기까지 놓쳤잖아. 내 생애를 통틀어 손에 꼽게 끔찍했던 날이야. 근데 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이번에는 비행기 티켓 날짜를 잘못 끊어서 18시간 동안 공항에 머물게 됐어.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한심해. 분명히 여러 번 확인하고 티켓팅을 했는데 왜 날짜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잘못 끊은 날짜가 하루 차이라는 거야. 만약에 일주일 이상 달랐다면 난 미얀마여행을 포기하고 그냥 태국을 여행했을 거야. 놀라운 건 티켓팅을 잘못했다는 걸 태국에 와서 알았다는거지. 이제 8시간이 지났고 앞으로 10시간이 남았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기게도 친구가 생겼어. 중국인인데 이름은 ‘타오’야. 태국에서 유학 중이래. 이제 스무 살인데 애가 많이 귀여워. 빨간 뿔테 안경에 신발도 빨간 컨버스 화를 신었고, 키는가 165 정도에 무척 말랐어. 영어는 나보다 훨씬 못하는데(얼마나 못할지 짐작이 가지?) 말은 정말 정말 많고, 한국 연예인에 관심이 많아서 나보다도 연예인 이름을 더 많이 알아. 내가 공항 의자에 누워있는 때 타오가 다가와서 했던 첫마디가 뭔지 알아? 날 이렇게 내려보더니 “Who are you?”라고 하는 거야.
세상에 후아유라니. 넌 이 말을 실제로 써본 적이 있니? 난 중학교 때 이후론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이름? 직업? 국적?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까 “Do you speak English?” 다시 묻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그냥 영어를 못한다고 할 걸 그랬어. 말이 정말로 많아.
수영아. 너는 만약에 누군가 '후아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난 결국 내 이름과 국적을 말했거든. 근데 마음속에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전혀 다른 대답이 올라오더라. ‘실패한 영화인’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들었겠지만 난 더 이상 영화 일을 하지 않아.
영화일 뿐만 아니라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도 만나지 않아. 영화를 아예 보지 않고 지낸 시간도 꽤 길어. 당연히 극장도 가지 않았고. 요즘엔 가끔 보긴 하는데 예전처럼 영화에 대한 글을 쓰거나 ‘나도 저렇게 찍어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보는 것뿐이야.
네가 떠난 게 5년 전이고 내가 영화 일을 그만둔 게 3년쯤 됐으니까 그 시간 동안 많은 게 변한 거지.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내가 이 결정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 가장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가장 이해해줄 거라 믿었던 사람이 너였어. 근데도 연락하지 못한 건, 네 입에서 “그래도 계속”이라는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웠어. 솔직히 난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았거든.
나도 그때는 몰랐지. 이렇게 몇 년이 지나서 스스로를 ‘실패한 영화인’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걸.
처음엔 이 말이 너무 아팠는데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어. 익숙해져도 아픈 건 똑같지만. 특히 조금 전처럼 갑자기 떠오를 때면 더더욱 그래. 하지만 겉으로 태연하게 보이는 법도 익혔어. 어쨌든 그게 사실이고,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하니까.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도대체 언제까지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야 할까? 앞으로 나에게 다른 이름은 없는 걸까?
수영아. 난 지금도 궁금한 게 말이야. 우리가 비행기를 놓쳤을 때 넌 어떻게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어?
솔직히 난 지금 상황이 너무 화가 나거든. 만약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비행기티켓을 잘못 끊었다면 난 그 사람한테 엄청 화를 냈을 거야. 더 솔직하게 말하면 스스로에게 너무나 화가 나.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렇게 내가 ‘실패한 사람'이란 걸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되새길 때- 한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어. 할 수 있다면 이 몸에서 벗어나 이 공항에 있는 누구든 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이 마음이란 걸 꺼내서 지금 내 앞에 떠들고 있는 타오에게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어. 너는 자주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게 멋있다고 말했었지. 수영아. 한 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난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아마 여행 내내 너에게 편지를 쓸 테니 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나는 네가 기억하는 사람과 달라.
편지를 쓰는 동안 벌써 3시간이 지났어. 타오가 도대체 뭘 그렇게 오래 쓰냐 묻길래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어.
수영.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우리가 비행기를 놓쳤을 때보단 훨씬 나은 것 같거든. 그렇다면 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는지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3년 동안 답장을 하지 않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건 꼭 대답해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