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런것들을좋아해
너에게 편지를 쓸 땐 너무 많은 얘기를 적는 것 같아 걱정이 되면서도 막상 다 쓰고 나면 여전히 하지 못한 말이 남아있어. 날마다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데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잠에서 깨고 잠깐 일기를 쓴 뒤 너에게 편지를 써. 어떤 말은 일기장에 적는 것보다 편지로 적는 게 더 나은 것 같거든. 새벽이고 아직 다섯시가 안됐어.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는 나의 돈과 젊은 시간을, 그리고 젊음이 떠난 뒤의 시간까지 빼앗아갔지만 그 와중에 남기고 간 것도 있어. 첫 번째는 모든 걸 기록하는 습관이야. 네가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내 첫 직책은 ‘스크립터’였어. 사실 그 감독 완전 사기꾼이었는데, 그땐 아무것도 모르니까 스텝이 된다는 것만으로 기뻐서 너한테 전화를 했었지. 그날 저녁에 네가 삼겹살을 사줬던 것도 기억나.
그때 내가 했던 일은 촬영 날의 날씨부터 시작해서 각 씬의 카메라 앵글, 배우의 동선, 의상 등을 체크하는 일이었어. 지금 생각해봐도 난 그 일을 꼼꼼하게 잘했던 것 같아. 좋아하기도 했고. 그리고 나에겐 스크립트 노트 말고 다른 노트가 하나 더 있었는데 거기엔 훨씬 개인적인 걸 기록했어. 촬영 날에 있었던 사사로운 사건들과 오늘은 감독이 어떤 곤조를 부렸는지, 스텝들 간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과 그 틈을 비집고 피어나는 연애 기류까지.
이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난 거의 모든 걸 기록해. 이건 여행에도 그대로 적용돼서 한 도시의 인상부터 시작해서 그날 본 비둘기의 생김새까지 글로 적어놔. 어떤 날은 도시의 흙색깔과 촉감을 적기도 해. 사람은 더 자세하게 적지. 잠깐 스친 사람이라도 내게 특별한 인상을 줬다면 짧게라도 기록해놓아.
예를 들면 시장에서 고기를 손질하던 상인의 눈빛과 팔근육(그의 팔은 막 용광로에서 꺼낸 고철같이 붉고 단단했어. 그리고 그는 왼손잡이였어.),
옆방에서 잠꼬대하는 여행객의 특이한 목소리(마치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 같았어. 다음 날 만나보니 그는 일본인이었는데 원래 목소리는 평범해서 더 놀랐지.),
사원 구석에서 몰래 취침 중인 스님의 자세도 적혀있어(난 요가가 저런 좁은 곳에서 몰래 자면서 생겨났을 거라 생각해.).
두 번째는 카메라를 통한 기록이야. 독립영화 일을 할 땐(왜 그땐 그 독립이 자본에서의 독립인 걸 몰랐던 걸까?) 수입이 거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광고나 홍보영상 쪽 연출부 일을 많이 했어. 이건 네가 떠난 다음에 일이야. 많은 프로덕션을 전전했고 그중 한 곳에서 자주 일을 했는데 거기 촬영감독이 몹시 게을렀어. 심지어 자기가 피곤한 날이면 나한테 찍는 법을 대충 알려주곤 차에 가서 잠을 자기도 했어.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분 덕분에 촬영이란 걸 배우게 된거지. 1년 정도 지나서 그 촬영감독은 회사에서 쫓겨났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됐어. 그 감독보단 적은 돈이었지만 연출부 아르바이트보단 훨씬 큰 돈이었지. 조금씩 돈이 모이자 내 카메라를 사게 됐고. 그땐 영화를 찍기 위해 산 거였지만- 이젠 그걸로 사진을 찍어.
이렇게 난 두 가지로 내가 본 것들을 기록해. 찍지 못한 건 글로 적고, 적지 못한 건 사진으로 남겨. 두 가지를 같이 할 때도 있어. 이 얘기를 하는 건 오늘도 악몽을 꿨기 때문이야. 이상하게 미얀마에 온 뒤로 자주 같은 꿈을 꿔. 대부분 소리를 지르거나 울면서 잠에서 깨는데 신기한 건 내가 서울에 있을 땐 이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거야. 처음엔 혼자 낯선 곳을 여행하니 두려운 마음에 그러는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양곤에서 꿨던 꿈을 만달레이에 와서도 다시 꾸니 이젠 좀 이상하게 느껴져.
이 악몽은 늘 극장에서 시작해. 난 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고 스크린 속 영화는 매번 달라. 사실 이 꿈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극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중요하지. 아예 모르는 사람이 나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다 영화 일 할 때 만났던 스텝들이야. 꿈이 시작되면 우선 내 앞 좌석에 있는 친구가 가장 먼저 날 쳐다봐. 한 번 쳐다보기 시작하면 그 친구는 영화 대신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그 친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 역시 날 쳐다보고 있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뒷좌석에 앉은 모든 사람이 영화 대신 날 보고 있어. 그렇게 극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대신 날 쳐다봐.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땐 바로 꿈에서 깰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난 아이처럼 울기 시작해. 정말로 아이처럼 울어. 그나마 다행인 건 누구도 자리를 벗어나 내게 다가오진 않는다는 거야. 그저 쳐다만 볼 뿐이지. 난 극장 의자가 요람인듯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은 채 어서 이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려. 그렇게 기다리다가 잠에서 깨고. 몇 년 전에도 이 꿈을 꾼 시기가 있어. 꽤 오래전 일인데 이상하게 여행을 온 뒤 이 꿈이 다시 시작 됐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옛날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걸까? 수영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난 영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난 뭘 두려워하는 걸까?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일기장에 내가 두려워하는 걸 쭉 적어봤어. 굳이 여기에 옮겨 적진 않아. 그냥 이렇게 두려운 게 많아서 앞으로 어찌 살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시간이란 건 냉정해서 이미 지나간 것 중 단 하나도 바꿀 수 있는 게 없어. 돈을 주고, 무릎을 꿇어도 불가능한 일이지.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게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번에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적어봤어. 다행히 생각보다 많더라. 그 중엔 글쓰기와 사진 찍는 일도 있었어. 그리고 그 순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고.
그냥 내 일기장이 아닌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었어. 내가 아직 좋아하는 게 있다고 말이야. 난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걸 보는 게 좋고, 길가에 누워있는 고양이를, 골목에 아이들을, 내 옆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는 걸 좋아해. 파란 하늘도 좋아하고, 비가 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도 같은 마음의 크기로 좋아해. 잎이 풍성한 나무도 좋아해서 옆에 지나갈 땐 꼭 만져보고 그 나무 아래서 편안하게 쉬는 것도 좋아해.
수영아. 이런 건 굳이 잘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맞지?
난 더이상 내가 좋아하는 일을 두려운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소가, 좋아했던 사람이, 무서운 모습이 돼서 꿈에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아. 이 꿈을 꿀 땐 난 늘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게 같이 일한 사람들인지 영화인지 아니면 나인지 잘 모르겠어. 이게 사과가 가능한 일인지도 의심이 들고.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내가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건 지키고 싶어. 이게 내 직업이 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일로 계속 남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