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200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진 Dec 19. 2020

유치원 포토그래퍼의 조언

유치원 촬영을 다녀왔다. 아이들 인터뷰 몇 컷과 현장 영상을 찍는 일이었다. 그동안 학교 촬영을 많이 했던 터라 유치원도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아이들은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라'하면 저쪽으로 갔고, '여길 보라' 하면 딴 곳을 봤다. 어떤 아이는 꼭 엎드려서 인터뷰를 하겠다며 고집을 피웠고, 이어서 다른 아이들도 뒤돌아서, 누워서하겠다고 우겨댔다. 겨우 의자에 앉혀 촬영을 시작했으나 몇 초도 안돼서 남자아이 하나가 카메라 앞으로 꿈틀꿈틀 기어갔고, 그걸 본 다른 아이들도 따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난장판이었다. 그렇게 오전 촬영이 끝났다.


점심을 먹으러 가니 다른 교실에서 졸업사진을 찍은 포토그래퍼님이 먼저와 계셨다. 진이 빠진 나와는 다르게 그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원장 선생님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옷차림과 표정, 가지고 있는 장비에서 연륜이 보였다. 같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유치원 촬영만 십수 년 해오신 분이셨다. 내가 물었다.


"유치원 촬영 어렵지 않으세요? 저는 처음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애들이 말도 안 듣고..."

그는 나를 한 번 살피더니 말했다.

"아직 아이 없으시죠?"

"네."

"보통 아이가 없는 분들이 그런 말을 하거든요. 자기 애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아이가 있으면 어떤 걸 알게 되는데요? 촬영하실 때 팁이 있으면 저도 알려주세요."

이후 그가 해준 이야기는 단순한 팁이라기보단 깊이 있고 따뜻한 조언이라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아이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많은 걸 알아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 화가 났는지, 참고 있는지, 날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도 알아요.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안다고 생각하며 대해 보세요."


사실이었다. 난 아이들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 내 말을 당연히 따르리라 여겼던 것도 '아이들은 모른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으니까. 알고도 단체로 기어 다녔다는 게 괘씸했지만, 어쨌든 내 고충을 아이들도 같이 느끼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목소리 톤을 지금보다 2옥타브 올려라.

"지금 목소리로 말하면 아이들에게 잘 안 들려요. 안 듣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거예요. 여기 선생님들 봐요. 다 피치가 높잖아요. 지금보다 2옥타브 올려봐요."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다 목소리가 높았다. 자신과 비슷한 음역대가 잘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 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의 말투나 어휘를 따라 할 때가 있다. 심지어 하모(우리집 고양이)에게 말을 걸 땐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는데 왜 아이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살필 것.

"아이들 마음은 어른처럼 복잡하지 않아요. 원하는 게 분명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미루지 않아요. 그럴 땐 하게 놔둬야 해요. 만약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거 끝나고 하자!'라고 정확히 말해주세요."


이 얘기를 들었을 땐 한 편으로 부러웠다. 내 마음은 이렇게나 복잡해서 원하는 걸 찾기 힘들고, 찾은 뒤에도 그걸 꺼내놓는 게 조심스러운데. 아이들은 그런 과정이 없다는 게. 그리고 내 마음도 원래는 저런 모양이었겠지 생각했다.


좋아하세요.

"자기 아이가 있으면 다른 아이도 예뻐 보여요. 그냥 봐서 '아 예쁘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좋아하게 돼요. 좋아하면 이해가 돼요. 아이들은 본인이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상대를 친구로 대해요. 그럼 촬영하기 훨씬 쉬울 거예요."


마지막 조언은 단순했다. '좋아하면 이해가 된다.' '서로 이해를 주고 받는 사이가 친구다.' 글로 적으니 참 쉬워보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단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관계를 맺는 건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 일이라 생각한다. 너와 나는 결국 다르니까. 다르니까 '표현'이 생겼을테다. 말, 글, 표정, 몸짓은 결국 이해받고 또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그 이해가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나는 오래 잊고 지냈던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르바의 춤과 'Another Day of Su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