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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님이 말한 "좋아하세요."를 떠올리며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늘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 아이들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자식처럼 예쁘다'라는 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저기 있는 애들이 내 자식은 아니라는 거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한 아이가 "카메라맨 아저씨다!" 외치며 달려들었고, 자기 속도를 못 이긴 아이는 삼각대를 밀어 넘어뜨렸다. 다행히 카메라는 내 손에 있어서 망가진 장비는 없었지만, 겨우 평정을 찾은 마음에 다시금 화가 모였다. 아이는 결국 담임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남에 물건을 넘어뜨리면 안 되는 거예요."
아아는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거 알아요. 실수라 해도 잘못했을 땐 '죄송합니다' 말해야 해요."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또박또박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나도 '괜찮다'고 말하며 아이와 눈을 맞추는데, 그 불만스러운 눈빛과 볼록 튀어나온 볼이 영락없이 하모 같았다. 그리고 하모라면 나도 좋아할 수 있었다.
조건 없음
하모는 보통 18시간 이상 잠을 잔다. 깨어있는 6시간 동안은 사료를 먹고, 그루밍하고, 좋아하는 구석진 자리를 순회한다. 그리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내 옆으로 와 눕는다. 하모에게 난 늘 마지막이지만, 세상에서 하모를 가장 사랑하는 건 나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엔 조건이 없다.
오랜 시간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하모와는 애초에 그런 '주고받음'이 성립되지 않았다. 어쩌면 하모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으로, 나는 처음으로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은 그 쯤부터 조금씩 변화했다. 다른 대상이 하모처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얀마를 여행할 때였다. 시골길을 걸으며 여러 동물과 마주쳤는데 신기하게도 모두가 하모를 닮아있었다. 새, 소, 오리, 돼지 등등 만나는 동물마다 하모 같았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하모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됐다. 손짓에서, 밥 먹는 모습에서, 졸고 있는 자세에서, 예민해진 얼굴에서 하모가 보였다. 그 역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모두를 하모처럼 바라보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러지 못하기에 후회하고, 조언을 듣고, 글을 쓴다. 나는 미운 사람이 너무 많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서 아주 가끔씩 하모를 보게 될 때, 포토그래퍼님의 말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이 후 촬영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목소리를 2옥타브 올렸고, 내가 원하는 걸 말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어떻게 인터뷰를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아이들도 대답해줬다. 여전히 정신없는 촬영장이었지만 몇몇 아이들은 하모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