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다는 건_장례식장
2주일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불과 며칠 전에 통화할 때 까지만 해도 평소랑 다름없이 얘기를 나눴는데 전화를 하고 난 다음날 응급실에 가셨고 이틀 뒤에 계셨던 병상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여러번의 응급실을 가셨지만 언제나 건강을 되찾으시고 퇴원을 하셔서 이번에도 그렇게 퇴원하실 줄 알아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해서 형과 나를 키워주셨고 항상 우리 가족에 대해 궁금해 하셨는데 이렇게 가시니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아 서운하고 죄책감이 든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장례 과정과 그 순간순간의 감정을 기억하면서 조금이라도 잊지 않고 새기고 싶었다.
_장례 1일차
새벽 5시 35분. 이시간에 울리는 아버지의 전화 벨소리가 유독 낯설고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전화를 받으시고 끊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고 옷을 입으셨다. 직감적으로 우리는 몇시간 뒤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는 걸 느꼈다. 깨우지 않으면 12시간 이상은 자는 형도 전화가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렇게 그렇게 형과 나는 안방으로 갔고 어머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니 매우 안 좋았다.
'심정지'
책이나 영화가 아닌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게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피부에서 느껴지는 말로 서술할 수 없는 당시의 그 분위기는 더이상 깨어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서둘러 우리는 옷을 입고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갔다.
아침 7시. 중환자실 앞에 12명의 가족들이 모였고 차가운 병상에 누워 계신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모였다. 2명씩 중환자실로 들어가 할머니의 모습을 뵈러 갔다. 먼저 들어간 A씨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아니라 비명소리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슬프다는 느낌보단 무서웠다. 돌아기신 할머니의 모습을 마주하기에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뵐 수 없다고 생각해서 다음 순서로 들어갔다.
병상의 커튼을 걷고 마주했을 때 할머니의 표정은 영화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으시고 계시진 않았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들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할머니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은 시체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부르면 깨어나실 거 같은데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 ECG 케이블의 선은 잔잔한지 오래 된 거 같았고 큰 소리들이 들리는데도 할머니의 눈은 꿈뻑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그렇게 모두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뵙고 할머니를 장례식장에 모시기로 했다. 중환자실에서 할머니가 안치되어 있는 관이 나오자 가족들이 할머니의 모습을 더 볼려고 했지만 천으로 들췄을땐 할머니는 이미 어떤 천으로 쌓여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던 건지 할머니의 모습을 보기 무서운지 모르겠다. 그렇게 할머니가 안치된 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아버지께서 각자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형은 할머니를 모시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갔고 나는 택시를 타고 혼자 집으로 갔다.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나는 러닝머신 30분을 탔다. 지금 이순간이 실감이 나지 않아 평소 하던대로 했고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 왔고 가족들의 짐을 챙기고 2시에 어머니와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땐 아직 준비중이라 어수선하고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사진사 분께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건네주셨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미처 찍지 못해 사촌 형 결혼식때 찍은 할머니의 사진을 사용했다. 그렇게 영정 사진을 단에 올리고 가족 모두가 모여 절을 올렸다. 점점 슬픔이 몰려왔다.
조문은 11시까지 이어졌다. 그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뵈었고 할아버지의 동생인 짱구 할아버지도 오셨다(어렸을 때 내가 '작은'이라는 발음을 '짱구'라고 해서 아직까지 짱구 할아버지라고 한다). 두번 절을 올리시고 할아버지는 주저 앉아 한참을 우셨다. 그런 모습을 처음 봤지만 당황스러웠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죄송했다.
_장례 2일차
오전 6시에 일어났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30분 정도 런닝을 했다. 러닝을 하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는데도 일상은 그대로 흘러갔다.
8시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가족들이 모여 간단하게 오늘 일정에 대해 들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입관을 하는 날이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어렸을때 할아버지가 돌아셨을 때 입관 후 가족들의 대성통곡 했던 것이 기억이 나 마음의 준비를 위해 유튜브로 입관 절차를 봤다. 영상에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입관 절차를 보는 것 만으로도 몹시 슬펐는데 가족인 할머니의 입관은 얼마나 슬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10시에 입관실에 들어가고 차갑고 딱딱한 철제 테이블 위에 할머니가 누워 계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자마자 우리 모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할머니의 마지막이 이제 와닿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어렸을때 부모님께 혼나고 몇십년만에 경험해보는 이런 반응에 주체를 할 수 없었지만 이런 감정을 놓치다간 조절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꾸역꾸역 참았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안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가녀리고 차갑게 변한 할머니를 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소 전혀 울지 않은 아버지조차 눈물을 보이셨다. 펑펑 우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나처럼 슬픔을 참고 계셨다.
입관을 마치고 나는 바로 올라가지 않고 차에 들어가서 감정을 추스렸다. 주변에 누구도 보이지 않으니 억눌렀던 감정을 여과없이 흘러보냈다. 할머니와의 어렸을 때 기억을 곱씹어 보니 차마 그 순간순간에 감사하다고 고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렇게 10분 가량 혼자 우니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
입관을 마치고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모두 절을 올리고 다시 조문을 시작했다. 오후동안 한산하긴 했지만 조무을 하러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오신 분들이라 하나하나 찾아가서 절을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둘째날은 외가의 친척들이 거의 다 오셔서 조문을 해 주셨다. 섭섭한 기분에 외가 친척들이 오시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한참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친구들도 오셨는데 10년이 지났는데 다들 예전 모습 그대로 셔서 기억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_장례 3일차
장례의 마지막 일정이자 이승에서 할머니의 온전한 몸을 보내드리는 마지막 날이다. 어제보다 일찍 일어난 뒤 뒤 집에서 잔 엄마와 난 서둘러 짐을 챙겨 장레식장에 갔다. 간단히 오늘의 일정을 보고받은 후 우리는 1층에 할머니가 계신 관에 가 마지막 절을 올렸다.
우리 가족 모두 바로 명복 공원에 가지 않고 장례차를 타고 할머니의 시신을 실은 차와 함께 할머니가 계셨던 할머니댁에 근처를 돌았다. 할머니가 계셨던 공간에 들어가자 주체 못하는 울음이 터졌다. 할머니가 드셨던 과자와 반찬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할머니마저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듯이 미처 정리 못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 차갑고 마른 음식을 보니 이제 할머니를 여기서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울컥했던거 같다.
간신히 억누른 감정을 추스린 후 우리는 명복 공원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린 후 곧바로 화장을 준비하였다. 할머니의 관에 대고 우리는 모두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할먼의 관은 화장하는 장소로 옮겨졌고 우리는 그 상황을 모니터로 봤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바쁘셔서 형과 나를 단신으로 키우셨던, 시간이 지나도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묻던, 좋은 일은 축하해주던 할머니는 이제 1키로그램도 되지 않을 뜨거운 뼛가루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뼛가루를 옮겨 담은 유골함은 화장을 한 온기로 인해 따뜻해서 마치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따뜻한 손으로 우리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팔공산에 있는 법당에 가서 할머니를 납골당에 안치해 드렸다. 먼저 가신 할아버지 유골함 옆에 안치하였다. 아마 이렇게 두 분을 마주했던 건 14년 만인것 같다. 우리는 두 분을 향해 묵례를 하고 납골당에 내려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직까지 할머니의 부재가 익숙치 않고 눈물이 차오른다. 돌아가신 분을 사랑했던 정상적인 반응이자 진통이기에 이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온전히 느껴야겠다. 그것이 먼저 보내는 분에 대한 최후의 예의이자 사랑을 전하는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