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걱정이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까지 달려간 적 있나요?
나는 그런 적이 많다. 걱정은 나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뜨리는 상상의 괴물이 되어, 현실을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나는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현실을 피하려고 잠을 자곤 했다.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대화를 차단하는 남편에게 왜 회피하냐며 늘 불만을 쏟아냈지만, 돌아보면 정작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 왔던 건 나 자신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도 공부 대신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험과 관련 없는 책을 하루 종일 읽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속으로 빠져들며 입시의 부담에서 도망쳤다. 책을 읽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기에 어른들도 나무라지 못했고, 나는 그 틈을 타 혼자만의 위안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부모님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
직장에서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연락을 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거절이 어렵다는 핑계로 메신저 답장을 아예 하지 않았고, 불편한 관계는 아예 피했다. 대학생 때는 자주 클럽에 가자고 하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때 나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괜히 그 친구가 불편해졌고, 결국 피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내가 다시 말을 걸었을 땐 이미 타이밍을 놓쳐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돌아보면, 그 친구는 내가 솔직히 거절했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히려 이유도 모른 채 내가 자신을 피한 것이 더 서운했을 수도 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미안한 일이다. 좋은 친구를 내가 잘못된 판단으로 잃어버린 것 같아 지금도 아쉽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거나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늘 잠을 자며 현실을 피했다. 최근에도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자며 모든 걸 외면한 적이 있다. 중요한 건,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그 일이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회피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가? 사실 그것도 아니다. 몸은 더 피로하고, 정신도 개운하지 않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더 불편해진다.
내가 회피를 선택했던 이유는 결국 마주할 상황이 너무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는 늘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떠올렸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든 상황을 모른 척하고 외면하곤 했다.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아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회피 끝에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회피, 그리고 현실의 실패가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나면 문제를 회피한 나 자신이 한심하고 후회된다. 시간은 허무하게 흘러가고,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만 남는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그대로인데, 더 지친 상태가 된 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몰라 불안만 깊어진다.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결국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과거의 여러 힘든 일들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매번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맞서야 했던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마감이 닥치거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든 내향적인 나는 어릴 때부터 발표가 정말 싫었다. 초등학생 시절, 발표 시간만 되면 얼굴이 빨개지고, 긴장감에 하루가 엉망이 됐다. 선생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발표 못하는 아이’가 됐다. 그게 나라고 믿었고, 정말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발표가 ‘선택’이 아니었다. 먹고사는 문제였기에, 피할 수 없었다. 철저히 준비하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 결과 좋은 피드백을 받았고, 이제는 발표가 두렵지 않다. 조금 귀찮을 뿐이다.
회피하지 않고 마주했을 때 알게 됐다. 내가 상상했던 일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걱정은 늘 현실보다 앞서 달려가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덜 무섭다는 걸. 발표 전에는 늘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그 순간의 최선을 다하려고 했을 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다짐하게 된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실수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 앞에서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은 거절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작은 문제부터 직접 해결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 회피하지 않기 위해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는 중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걱정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 문제를 마주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내가 되고 싶다. 회피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