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B] vol. 6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by 나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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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이어 펼칩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을 생생하게 남긴 프리모 레비의 기록.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것이 인간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깊은 고민 속에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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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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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히브리어로도, 이탈리아어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세상 어떤 언어로도 인간의 비참한 몰락과 죽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당한 업신여김, 짐승 대우, 인간의 바닥을 경험하게 하는 다른 인간의 처사. 그 모욕과 절망을 표현할 말은 세상에 없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순식간에 정체를 드러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고통은 산사태처럼 이미 쏟아진 후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무’ 라는 말조차 무색한 현실 속으로 유대인들은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으면 프리모 레비에게 붙은 ‘생존 작가’라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건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는지.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형제 복지원’이라는 수용소 비슷한 시설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부랑아’라 불린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한 시설입니다. 그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책에서는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구술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인류 역사에 널리 퍼진 불가사의한 생존과 죽음 앞에 멍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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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e.aspx?CNTN_CD=A0002626749&fbclid=IwAR1np1svE-zTrFIi_AVF5z2ZMNKWSuOjaZn_Y5D73vb8q_78o2u2fPbFp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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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와 국면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n번방 사건입니다. 이 일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 자체로 모욕일 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n번방 사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부터 n번방 사건까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록으로도 남길 수 없는 온갖 모욕들이 우리 인간과 대한민국, 우리 일상을 조여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런 짓은 인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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