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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성훈 May 24. 2020

[letter.B] vol. 29 - 정말 필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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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호란은 천지개벽 이래 일찍이 없던 병란입니다. 전하께서 융통성 없이 필부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셨다면 종묘사직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전하께서 묘당의 의견을 받아 들이시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종묘사직의 혈식을 연장하게 되고 생령이 어육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지극한 어짐과 큰 용맹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국가가 불행하여 이 같은 상황에 놓였으니 임금과 신하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고생을 참으면서 오직 종사를 보전하고 동궁을 돌아오게 하며 징병을 모면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니 사사로운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제각기 올바른 데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말입니다. 


- 병자호란 2, 270p



병자호란 후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인조를 달래는 최명길의 말입니다. 최명길은 인조 반정 때부터 임금 곁에서 보좌하던 신하였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을 해준 것인데요. 어딘가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조선은 후금에 졌습니다. 오랑캐라고만 여기던 민족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조정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근왕병이 오기를 기다려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오랑캐에게 머리 숙인 왕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온 나라에 팽배했습니다. 인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명길이 인조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을 위로한다고 현실이 개선되지도 않고, 전쟁의 승패가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 뿐입니다. 이제와 생각하면 인조가 후금 즉, 청나라에 항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나라를 멸망에서 구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국가 상황을 잘 정비하고 미리 전쟁에 대비했다면 후일 이렇게 위로를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었겠죠. 그런다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비굴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최명길의 말처럼 가난하고 약한 집과 나라의 구성원들은 고난을 겪습니다. 우선은 살아 남는 게 먼저 입니다. 그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게 명분 없이 합리화만 해서는 다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위로할 건 위로하되, 근본 원인을 찾아 바꿔나가는 일을 병행해야겠습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로 곁에 두기 좋은 사람입니다. 


정말 필요한 건 얕은 위로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역사에서 한 장면 가져와 힌트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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