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다닐 때 성극에 참여한 적이 있다. 왜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하고 있었고, 배역은 ‘요셉’이었다. 구약의 요셉 말고, 예수의 아버지 요셉. 어린 나이에도 ‘아기 예수’가 주인공처럼 보였다. 내가 주인공이고 싶었으나 더 어리고 귀여운 아기가 예수 역할을 했다. 나는 주인공을 빼앗긴 걸 합리화 하기 위해, 예수의 아버지 역할을 한거니까 더 높은 배역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마태복음의 요셉은 고생이 많다. 메시아 탄생을 경계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하고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려다 또 다른 핍박자가 생긴 걸 알고 나사렛에 정착한다. 고단한 이주의 역사.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가까워도 특별한 교통 수단도 없던 당시에 이사는 정말 큰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타국. 난민이라고 봐도 된다.
성경에 자세히 묘사 되지는 않았겠지만 타향살이가 어디 쉬웠겠는가.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이 요셉의 입가와 가족의 일상에 불어 댔을 것이다. 고생 끝에 나사렛이라니. 삶이 참 고단하다.
요셉의 온 힘을 다한 보살핌 덕에 예수도 자랄 수 있었다. 나도 한 아이의 보호자가 되니 요셉의 일생이 무겁게 느껴진다. 많은 일을 겪고 성경 초반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삶. 부모의 생이 그런 걸까.
아이가 태어나니 모든 일에 아이가 주인공이다. 모임에 가도 아이 안부가 우선이다. 나조차도 퇴근하면 얘가 오늘은 잘 지냈나, 어디 아픈 곳은 없나 생각하고 살펴 본다. 서서히, 빠르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 주는 것. 어찌보면 그 상황에 익숙해져야 하는걸까. 딱히 주인공인 적도 없었는데 벌써 빼앗기다니. 아무튼 너라도 잘 살아라!
라고, 쓰는데 결이가 깼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