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다시 '일일 성경' 글쓰기를 시작한다. 위기 때 쓰기 시작한 글. 다시 위기라고 느끼기도 했고, 마침 성경을 한 번 더 읽기도 해서 뭔가 새로운 독해 방법을 찾다가 매일 한 장씩 읽고 그냥 일기처럼 쓰기로 했다. 기억이 나든, 안 나든. 내게 더 이상 성경은 어떤 구절의 문제가 아니다. 일상이나 마찬가지.
창세기 1장 1절은 읽을 때마다 두근거린다. 에너지가 느껴지고 리듬이 있는 본문인 것 같다. 내가 더 나이 들어 아이들이 아빠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의 아버지는 자기는 성경의 다른 구절은 다 믿겠지만 창세기는 못 믿겠다고, 그중에 첫 절은 정말 더 못 믿겠다고 했다 한다. 동감이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다. 신앙의 첫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 본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다른 본문도 읽을 수가 없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창조가 없는데.
창세기 1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아마도 '우리'라는 구절일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복수가 될 수 있나 하는 논란. 원문을 보지 못해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면 그 '우리'는 하나님 곁에 있던 천사 같은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만들기 좀 외롭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면 고대 근동에서는 신을 복수로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일신' 개념을 강제할 때에야 신이 단수지, 자유롭고 넓은 상상을 허락한다면 신이 복수라 해서 어색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냥 내 생각이다. 이 이상은 더 생각하지 못했고, 안 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 이 구절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었나 생각해본다. 아무 도움도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뭔가 오랜만에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점, 꾸준히만 쓴다면 성경 장수가 다 할 때까지 매일 쓸거리가 있다는 점이 좋다. 그리고 전처럼 억지로 끼워 맞추지도 않을 거다. 부끄러운 글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나는 나이가 서른여덟, 내년에는 아홉이다. 거짓으로 사는 건 이제 끝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게 복수든 단수든 말이다. 그 안에는 리듬이 있다. 모든 창조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