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특별해, 소중해'라는 말을 전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점에서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 내가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 경우의 일부분은 어떤 존재로부터 여겨지는 사랑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 한다. 혹은 무조건적인 부모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나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이해하는 누군가라면 그것 또한 충분하다.
타인이 나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기에 앞서서는 그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거나,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혹은 그 마음의 거리가 맞닿아 있을 때만이 온전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누군가의 삶과 신앙의 문제로 인해 사랑의 공급처가 느껴지지 않는 당사자인데, 타인이라고 그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관습적으로 소중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따듯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반성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과연 내 마음이 차갑게 얼어버린 것일까? 단순한 성향 때문일까? 익히 들어온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마음에 충분한 진심이 없는 소리는 누군가를 더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말하는 사람, 내 삶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이어야만 저 말이 위로가 되더라. 하물며 내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단순한 입술의 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조금은 두렵다. 그렇게 자연스레 입술을 닫는다.
때로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든다. 연민과 동정 그리고 무한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공급되는 것이며 전할 수 있는 용기는 무엇을 힘입어 바탕이 되는 것일까. 아직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벌어지는 일일까? 아니 하나님은 여전히 충만한 사랑을 주시는데 내가 눈 가리고 모른 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말의 무게가 느껴지는 요즘이다. 좀 더 깊은 생각에 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단순한 생활에 대한 가십거리조차 함부로 얘기하기가 어렵다. 나를 보는 나의 시선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는 날은 도대체 언제 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