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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Jul 23. 2020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공간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열린공간

차이를 조직하는 사회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차이를 조직한다. 아마도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과의 차이를 조직함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념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통용되려면, 대척점에 있는 이념은 틀린 것이 되어야하고 도태되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부를 계속해서 축척하고 유지하려면, 자본주의 논리 속에 핍박받는 빈민계층은 존재해야하고 그들의 요구는 묵살되어야 한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도구로써, 자신 외의 타자들, 자신이 속한 그룹과 다른 그룹을 타자화 하는 것이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늙은 게이들


타자화는 이제 성적 취향의 문제에서까지 발생한다. 국가를 막론하고 뿌리 깊게 퍼져있는 이성애 중심주의는 다른 성적 취향, 즉 성적 지향을 배척한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이성주의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보편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있는 성소수자들은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된다. 여성학계나 인권단체 등에서 이성애주의 해체를 주장하고 성소수자 차별을 규탄한다지만, 세상에 만연해있는 이성애주의 벽을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다. 동성애는 일종의 정신질환이고, 성소수자들은 사회의 절대악이다. 이성애 중심주의가 만든 굴레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편견에 노출되어 핍박받고 있다.



차이를 조직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들로 대변되는 퀴어는 타자화되는 집단 중에서도 가장 약자다.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인 성적 취향마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느니 말이다. 이성애자가 대다수인 사회에서 ‘호모’라는 낙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박탈당할 수 있는 중대 사안이고,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퀴어들은 사회의 음지 속으로 숨어들어 간다. 우리는 이러한 퀴어들의 고통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외면한다. 외려 차이를 조직하며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세운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주인공 '사오리'와 '하루히코'

보편의 사회에서 퀴어들의 특수성을 이해시키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안은 정말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이웃나라 일본의 퀴어영화인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코>(2005)는 우리에게 묵직한 함의를 전해준다. 늙은 게이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퀴어의 정체성과 고뇌를 현실감있게 다룬다. 무엇보다 게이들과 그들을 혐오하는 일반인의 소통과 이해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퀴어를 타자화하는 상황에서 사회의 주류인 핍박하는 주체와 퀴어의 화해, 공존, 어우러짐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카나가와 현 오우라 해안 근처, 한적한 바닷가마을에 있는 게이전용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에 여주인공 ‘사오리’가 일을 도와주러 찾아오며 시작된다. 평범한 삶을 사는 여자 사오리는 이성애자로 대부분의 현대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눈엔 메종 드 히미코에 모여 사는 가지각색의 늙은 게이들은 해괴망측한 타자들이고, 현대인들이 퀴어를 차갑게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 역시 편견이 서려있다. 특히나 과거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게이 아버지를 둔 사오리 입장에선 퀴어에 대한 더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었을 터다. 


게이를 혐오하는 주인공 '사오리'


그런 사오리의 서늘함은 양로원에서 일을 하는 동안 늙은 게이들과의 대화를 나누며 한결 따스해진다. 티격태격하는 말싸움에서부터, 부탁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비즈니스적 대화, 자신의 속내를 들춰내는 고백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진 게이들만큼 나누는 대화 역시도 가지각색이다.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칙이 있는데, 바로 말을 하는 두 주체가 온전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적당한 심적 거리를 유지한 채 말을 한다는 것이다. 


평소 신사적이던 중년의 게이 ‘야마자키’는 새하얀 드레스를 사오리에게 보여주며, 여자 옷이 입고 싶은 발칙한 꿈을 고백한다. 죽어서 여자로 태어난다면 예쁜 드레스를 맘껏 입고 싶다는 그의 말은 어딘가 처연하지만, 사오리는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바니걸 의상을 입을 수 없던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며, 여자도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며 공감하지만, 과도한 감정이입이나 감정의 혼돈은 발생하지 않는다.        



외재성을 유지하는 대화적 관계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주체와 타자의 대화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외재성을 강조한다. 외재성을 지닌 대화란 두 주체가 존재적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의 대화가 용해되지 않는 말의 주고받음을 가리킨다. 그저 타자의 말에 반응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응답하면 그만이고, 계속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독립적인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견해를 나누는 대화적 관계는 두 주체의 차이의 경계를 허물고,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한다. 영화 속의 사오리와 야마자키 역시도 외재성을 지키는 자기고백으로 함께 예쁜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하는 연대적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 사오리와 늙은 게이들이 함께 무도회장에 가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의 가사가 인상 깊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닫고, 서로의 이름을 지워버리면, 그제야 마음은 무엇인가를, 얘기해주겠지” 주체와 타자가 마음의 문을 열기보다는 오히려 닫고, 서로의 겉모습을 지워버릴 때만이 둘의 마음은 얘기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구태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 마음의 문은 열린다. 즉 바흐친의 말처럼 외재성을 지닐 때, 나와 타자는 소통할 수 있으며 공존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무도회장' 장면 스틸컷


영화 속 노래에 맞춰 사오리와 늙은 게이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춘다. 저 순간만큼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늙은 게이도, 젊은 게이도, 게이 아버지를 둔 딸도 모두가 그저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무도회장엔 차이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어울림만이 있다. 타자와 공존하는 길이 바로 저기에 있다. 아마도 메종 드 히미코라는 공간은 나와 타자가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일 것이다.  


우리의 사회 속에도 메종 드 히미코와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어쩌면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도처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었기에 지나쳤을 뿐. 우리가 의지를 갖고 타인과 만나려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현장이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차이를 조직하는 타자화의 청산은 나와 타인이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와 타자가 차이를 인정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대화하는 대화적 관계를 맺자. 나와 타자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며, 연대할 수 있다. 나와 타자가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길은 우리 안에 열려 있는 것이다. 

열린 공간, 메종 드 히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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