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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Jul 27. 2020

공감없는 이해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보여주는 공동체의식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속에 '소영'(윤여정 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이다.

“한 병 딸까요? 잘해드릴게.”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소영은 성욕이 미약한 노인들에게 죽여주는 서비스로 만족감을 안겨주며, 외로이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을 위로한다. 노인들은 소영을 통해서 죽어있던 성욕을 재확인하고, 소영은 노인들에게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소영의 성매매 손님인 노인들이 소영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소영을 찾는 노인들의 삶은 저마다 피폐하다. 이미 뉴스를 통해 고독사 소식이 전해져 알고 있는 것처럼, 독거노인들의 삶은 죽음보다도 못한 비루한 처지다. 영화는 죽고 싶은 세 명의 노인을 등장시켜, 노인 자살의 원인과 실태를 분석하여 보여준다. 독립생활 붕괴로 인한 자존감 파괴(중풍환자), 자아 상실의 공포(치매환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오는 절대고독(처와 자식을 잃은 아버지) 등 세 가지 유형의 노인 죽음을 잘 나타낸다.


노인에게 죽여주는 서비스를 하는(좌), 진짜 죽여주는(우) 소영


소영은 고민 끝에 세 명의 독거노인을 죽여준다. 노인들은 성욕을 채울 때도 소영을 찾더니, 이제는 죽음마저도 소영에게 기댄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넓은 아량으로 노인들을 품는 소영을 보며, 테레사 수녀와 같은 절대 희생의 어머니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은 끔찍하기보다는 따뜻하고, 어딘지 모르게 성(聖)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로자벳 켄터는 저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통해 유토피아적 공동체의 내적 결속은 압력이나 강제가 아닌 헌신에 근거를 둔다고 말한다. 공동체의식은 개인의 욕구보다 공동의 체계를 우선하기에, 누군가의 희생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근간을 두는 한국형 공동체주의는 항상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을 전제한다. 소영의 행위는 과거의 어머니들이 보여주었던 절대희생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있다. 노인들의 부탁을 받고 직접 죽여주는 소영의 행동은 개인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형편을 먼저 생각한 행위로,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담겨있다. 


가족도 사회제도권도 해결하지 못하는 독거노인의 문제를 그녀가 해결하고 있지 않은가? 중풍환자를 요양원에만 두고 찾지도 않는 가족이나, 치매 걸린 독거노인에게 기본적인 사회 안정망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사회제도권이나, 비정하고 무책임하기는 매한가지다. 비록 소영의 살인 행위가 범법행위일지라도, 책임감이 있는 이유이다. 소영의 희생으로 노인들은 본인들이 원하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고, 그토록 갈망하던 행복을 실현하게 된다. 그에 반하여 소영은 노인들의 행복을 실현해주는 헌신적인 선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죄의식에 짓눌려 점차 피폐해간다.

교도소에 수감된 소영

영화 말미, 소영의 살인행위는 발각되고, 소영은 사회 제도권에 의하여 심판받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죄 값을 치르는 소영은 차디찬 교도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배식 받은 끼니를 힘겹게 먹는다. 곡기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소영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숭고한 희생정신의 대가가 차가운 냉대와 절대고독이라는 사실에, 어느 것이 과연 진정한 선의고 정의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막힌 아이러니다.        



한편 소영은 사회적 소외계층과 이웃하여 살며 새로운 대안가족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소영이 사는 집은 다가구 주택으로, 위층의 집주인인 트랜스젠더 ‘티나’(안아주 분), 옆방 장애인 청년인 ‘도훈’(윤계상 분), 길에서 주어온 코피노 소년 ‘민호’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들은 서로 밥도 같이 먹고, 여행도 가고, 소영이 바쁠 때면 돌아가면서 민호를 돌봐주는 등, 긍정적인 공동체의 면모를 보인다. 


소영과 그녀의 이웃이 보여주는 대안가족의 면모는 각자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공생하는 조화로운 삶을 보여준다. 조화는 개체 각각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소영이 이루는 대안가족은 매춘부, 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등 개성이 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개성을 인정해준 채로 조화롭게 살아간다. 이는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따르는 모습이자, 과거 가족공동체가 야기한 권위주의나 수직적 관계 등의 폐단도 극복한 형태이다. 소영의 대안가족은 한국형 공동체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진일보한 공동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존중의 미덕이 존재해서다. 소영의 대안가족은 서로에게 군림하려 들거나 형편에 참견하려 들지 않는다. 수평적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중한다. 티나가 왜 트랜스젠더가 됐는지, 도훈이 왜 장애인이 되었는지, 소영이 왜 매춘 일을 하는지는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서로의 처지나 입장 따위에 관심을 갖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자세는 소영이 코피노 소년 민호를 처음 집에 데려왔을 때, 소영과 티나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코피노 소년을 데려오는 소영

  티나    걘 뭐야?? 

  소영    길에서 한 마리 주서 왔어.

  티나    뭐래? 아- 일 나가기 싫다.     


티나는 어떠한 사정인지 더 물어보지 않고 이내 관심을 끈다. 소영도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소영 역시 민호의 사정을 깊이 알지 못하고, 오갈 데가 없어진 처지만 목격하고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들은 사정을 설명하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넘어간다.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인을 식구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소영의 공동체 안으로 쉽사리 들어오게 된다. 타인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황을 존중해주는 자세가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감없는 이해


소영이 헌신적 자세로 독거노인들의 죽음을 거둬주고, 일면식도 없는 코피노 소년 민호를 가족으로 품어주는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 결말부에 이르러 소영의 입을 통해 주체와 타자간의 ‘이해’의 덕목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소영이 보여주는 이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이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비공감적 이해’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공감은 필수조건으로 치부한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것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 속에 전위시키는 현상을 뜻한다. 


타인을 향한 완전한 이해란 언제나 공감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나와 타인 간에 완전한 이해니, 소통이니, 공감이니 하는 것은 수사적 공염불에 불과할 수 있다. 타인은 타인이며, 타인을 향한 공감과 소통은 어쩌면 세계의 중심을 선점하고 있는 나의 교만일 수 있다. 나는 절대 타인이 될 수 없으며, 두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운명의 거리가 존재한다. 공감이란 현실 세계에서는 없을 이론의 영역 안에 갇힌 허상일 뿐이다.


나와 타인 간에 공감을 토대로 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영화 속 소영이 보여주는 이해의 형태를 재고할 수 있다. 소영은 타인을 공감하려 들지 않는다. 관망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존중한다. 공감하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더 쉽게 이해의 단계에 도달한다. 민호를 품은 것도, 노인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결국 소영이지 않은가? 소영이 보여주는 절대적 선의의 실행이 타인을 향한 이해의 미덕 말고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소영의 이해에는 공감은 배제되어 있다. 

 

소영이 실현하는 대안 가족


공감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이해가되는데 말이다. 나와 타인 간에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를 인정하고, 서로의 모습, 상황 등을 존중해준다면 충분히 ‘공감 없는 이해’는 실현될 수 있다. 이론적 허상에 불가한 공감이나 소통보다 더 실재적이다. 공감 없는 이해의 태도는 소영의 대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고찰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대사이자, 영화의 메시지를 축약하는 상징적 말이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타인의 사연을 존중하는 소영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 발생하였을 때는 필히 그만한 사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의 사정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게 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면, 그 입장에 놓이지 않는다면 절대로 공감될 수 없다. 애석하게도 나는 절대 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심정이나 사정은 추측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 완전한 이해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나와 타인의 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이 발현되는 진정한 공감과 소통은 최고의 이상향이다.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실현이 가능하다는 전제조건하에서 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타인과의 차이를 조직하며 갈등하는 문화의식의 토대에서 과연 발현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영의 저 대사처럼 더 이상 알려하거나 공감하려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넘어가는 자세가 현명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나와 타인의 상호존중을 실현하고, 소통과 이해의 단계로 도달하게 하는 길이다. 


영화 속 소영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항상 존중하려는 태도로 적정선의 관계를 유지한다. 공감하려 들지는 않지만, 사람마다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는 이해한다. 그리고 타인을 감싸주거나 포용한다. 이처럼 소영이 보여주는 타자관계는 남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작금의 시대에 대안적 삶의 방식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결국 희생이고, 배려이고, 공동체의식의 복권이며, 휴머니즘이다. 우리에게 소영이 있는한, 혹은 우리가 소영과 같은 태도를 갖는다면,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약자들이 존중받는 공동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가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란, 그런 발칙한 기대를 감히 해본다.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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