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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Oct 09. 2020

참고 참다가 내쉬는 죽음의 숨, 물숨

영화 <물숨>_ 해녀들의 또 다른 이면

“제주에는 살기 위해 숨을 멈춰야만 하는 여인들이 있다.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우도의 해녀들이 온종일 숨을 참은 대가는

이승의 밥이 되고, 남편의 술이 되고, 자식들의 공책과 연필이 되었다.

하지만 해녀들은 안다. 욕심에 사로잡히는 순간 바다는 무덤으로 변하고,

욕망을 다스리면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의 품이 된다는 것을...”

-영화 <물숨> 시놉시스 중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는 힘이 세다. 영화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다큐멘터리 장르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사실성의 견지를 통해 대상의 이면에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다른 장르의 영화보다 관객에게 화면 속 삶의 모습이 진실하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진실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객관적 상황만을 담는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은 실제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진실에 다가가려는 모든 주관적인 노력들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감독이 다큐멘터리에 담으려는 삶이 진실이라 간주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진실성은 확보된다.

 

영화 <물숨>에 담기는 해녀들의 삶의 진실도 감독의 주관적 노력으로 구축된다. 감독은 해녀들의 삶과 정체성을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칠 년 간 함께하며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또한 나레이션을 통해서 해녀 개개인들의 삶의 형편이나 과거, 생각이나 내면의 상처 등을 대신 이야기해준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인터뷰를 통해 해녀들의 삶에 대한 증언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자기 인식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구성을 선보인다. 영화 속 해녀들이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 감독은 따뜻한 시선과 공감의 언어를 보태어 한 편의 위대한 여정을 만들어낸다.  


위대한 여정을 함께하며 새롭게 알게 된 개념이 하나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물숨’이다. 영화는 물숨을 가리켜  참고 참다가 내쉬는 죽음의 숨이라고 설명한다. 해녀는 자신의 숨의 한계에 순응하고 있으면서도, 간혹 그 한계를 잊어버리고 바다에 머물 때가 있다. 바로 자신 안에 욕심이 스며드는 순간인데, 이때 해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자신의 숨을 넘어서려고 든다.

 


“밖에 나오려다가 전복이라도 봤다 그러면, 떼서 나오려다가 숨이...”

이 욕심은 해녀들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해녀들은 자신의 숨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좋은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눈이 멀고 판단이 흐려진다. 특히 전복은 해녀들의 눈을 멀게 하는 대표적인 해산물인데, 흡착력이 강해서 한 번에 떼고 나오기가 어렵다. 해녀들은 숨이 다다랐음을 알면서도, 물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전복이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없기에 자신의 숨을 넘어서려 한다. 그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숨을 넘어서는 순간, 물속에서 먹게 되는 숨이 바로 물숨이다. 잘라내지 못한 욕망의 숨인 것이다. 물숨을 쉬는 순간 해녀들은 바다에 잠들게 되기 때문에, 물숨을 가장 두려워한다.


“해녀들에게 ‘조심하라’ 당부하는 것이 이거야. 물숨 먹어서 죽을까 봐.”


선배 해녀들이 물질을 가르치면서 가장 당부하는 것도 이 물숨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숨은 매년 제주의 해녀들을 육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해녀들에게 바다는 죽음과 가까운 공간이었다. 바다는 포작선을 타고 바다로 간 남편을 삼켰고, 물질을 물려받은 열여덟 딸을 뭍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해녀가 물질하는 동안에도 죽음의 위협은 도사리고 있다. 발목을 휘감는 해초더미며, 머리 위를 지나는 고깃배며, 삶의 터전인 바다는 언제든 죽음의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영화는 해녀들에게 값진 보물을 내어주는 자애로울 것 같았던 바다의 또 다른 이면을 들춰낸다. 많은 해녀 관련 영화들이 바다의 경제적 가치와 천혜의 지형에 집중하며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물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바다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 바다 앞에 선 해녀의 번뇌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담아낸다. 영화는 해녀들의 물질 이미지를 통해 바닷속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해녀의 상황과 욕망을 은유한다.


영화 속 출연자였던 고창선 해녀는 늘 그랬듯 물에 들어갔다가 물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딸 강덕희 해녀는 엄마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바다로 향한다. 해녀인 딸은 엄마의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인다. 해녀는 살기 위해 들어간 바다가 무덤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해녀들이 실제로 그러하다. 남편을 묻고, 딸이 묻힌 그 바다에 또다시 물질을 하러 들어간다. 먹고살기 위해, 이승에 남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죽음을 품은 삶의 터전에서 힘차게 물질을 한다. 해녀에게 바다란 그런 곳이다. 자신의 딸을 묻은 바다를 그저 멀멀하게 바라보는 늙은 해녀의 쇼트는 죽음에 대한 해녀의 해탈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영화는 해녀들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해녀들의 삶의 의지를 확인한다. 해녀들은 입을 맞춘 것처럼, 모두가 바다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물숨을 먹는 바다, 내 가족이 잠든 바다, 바다는 곧 죽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바다를 사랑하며, 다시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마음이 괴로울 때도 바다에 가면 슬픔을 잊어버릴 때도 있어, 그것이 물 힘.”

 

아마도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지 않을까?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의하면 자아정체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인식을 통해 형성하것이. 영화 <물숨>의 해녀들도 각자가 경험한 서사를 들려주며, 스스로가 인식하는 정체성에 다가선다. 해녀들이 스스로의 전기를 통해 말하는 정체성은 그저 바다가 좋고, 물질하는 게 행복한 평범한 인간이다. 바닷속에서 해녀가 되고, 죽어서도 바다로 돌아가는 바다의 여인 해녀들은 바다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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