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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Oct 27. 2020

나도 가끔 네 꿈을 꿔..

영화 <윤희에게>_ 현실과 환영의 사이에서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도 꿈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횡단한다. 영화는 극단적 리얼리즘으로 현실을 더 그럴듯하게 반영하기도 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에 없을 비현실적인 환영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적인 것에 대한 관점은 개인마다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영화의 시간은 현실과 환영을 교차하며 채워진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된다면 영화는 외면하고 싶은 실상, 허무맹랑한 망상이 되어버린다.


우리의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물론 현실은 눈앞에 실재하는 모든 사실이기에 그 어떤 환상적 사건도 일어나는 순간 현실이 된다. 환영이란 현실에선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고, 환상적인 사건은 뉴스에서나 접할 수 있는 특수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 안에서 환상을 기다린다. 늘 겪는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생경한 무엇을 갈구한다. 현실은 익숙함에 젖은 타성이고, 환상은 고정된 삶을 환기할 신기루다. 우리는 현실에 없는 환상을 영화에서 찾곤 한다. 아마도 영화적인 순간이라 함은 신기루가 발현되는 찰나이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영화 <윤희에게>는 지독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실낱같은 환상을 심어놓는 환영적 리얼리즘을 감행한다. 영화 초반 스크린을 메우는 윤희(김희애 분)의 삶은 여느 이혼녀의 생처럼 피곤하고 권태롭다. 생계를 위해 급식소에서 기계적으로 반찬을 담고, 취할 때마다 찾아와 귀찮게 하는 전남편을 상대하고, 시니컬한 딸 새봄(김소혜 분)이 내뱉는 무심한 말에 상처 받는다. 귀갓길에 어두운 골목에서 태우는 담배 한 개비가 유일한 위로일 정도로 윤희의 삶은 고단하다. 배우 김희애의 우아한 얼굴로 표현되는 윤희의 고단함은 역설적으로 그 피로감을 심화한다.    



무엇보다 윤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윤희의 사랑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다. 윤희의 첫사랑의 상대가 일본인 여성 쥰(나카무라 유코 분)이라는 사실은 참으로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윤희의 부모님은 병에 걸린 거라며 정신병원을 다니게 했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오빠는 여전히 감시하려 든다. 윤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느껴질 만큼 고독한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이처럼 윤희를 둘러싸고 있는 영화 속 세상은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우리의 현실과 같다.     


영화는 윤희에게 지독하리만큼 차디찬 현실을 부여하며 리얼리즘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관객들도 외면하고 싶은 사회의 이면을 반영한 깊은 사실성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윤희의 곁에 존재하는 영화 속 사람들은 저마다의 노력으로 윤희를 리얼리즘의 늪에서 건져낸다. 팍팍한 윤희의 삶에 한 떨기 환상을 내려준 것이다. 일상에 지친 윤희는 딸과 함께 눈이 그치지 않는 일본의 어느 작은 마을로 여행을 오는 일탈을 실행한다. 그 작은 결단 자체가 윤희에겐 판타지다.


소소하지만 커다란 윤희의 판타지 기저에는 그녀가 사랑한 첫사랑 쥰, 쥰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 분), 윤희의 딸 새봄, 새봄의 남자 친구 경수(성유빈 분)까지, 여러 사람의 행동이 켜켜이 쌓여있다. 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문득 윤희에게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쓴다. 책상 한 켠에 자리하게 될 편지지만, 진심을 눌러 담아 첫사랑 윤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소복이 쌓는다. 어쩌면 책상 서랍 속에서 나오지 못했을 편지를 마사코 고모가 발견하고, 그녀의 결단으로 우체통에 넣어져 쥰의 진심은 윤희의 집으로 도착하게 된다.    



쥰의 편지를 받은 새봄이 윤희에게 여행을 채근하고, 윤희를 첫사랑이 사는 곳으로 오게 만든다. 윤희의 일탈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결단과 수고가 자리한다. 그러나 윤희가 일본으로 왔다고 해서 그녀의 판타지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의 여행도 일상과 다를 것 없이 혼자이고 외롭다. 첫사랑과 해후는 그저 꿈일 뿐, 용기가 없는 윤희는 상상으로만 아름다운 재회를 그린다. 바보 같지만 현실에 시들어버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윤희의 꿈을 현실로 바꿔주기 위해 그녀의 속 깊은 딸 새봄이 움직인다. 남자 친구 경수의 도움으로 마사코 고모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가고, 쥰을 대면해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아 그곳으로 윤희를 보낸다. 밤의 가로수가 아름답게 일렁이는 거리에서 우연히 윤희와 쥰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 영화는 리얼리즘의 심연에서 나와 작지만 강력한 판타지로 전환된다. 새봄과 경수, 마사코 고모의 행동들이 모여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찰나는 현실에 갇혀있던 윤희를 구출하고, 그녀의 꿈을, 사랑을 뒤늦게나마 완성해준다.



비록 격정적인 해후의 장면은 없지만, 눈 쌓인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만으로도 관객은 아름다운 환상을 목도한다. 현실에는 없을 신기루다. 영화 <윤희에게>의 환영적 리얼리즘은 영화 속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기인한다.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새봄을 비롯한 이들은 영화의 시간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안간힘을 내었을까? 그 이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다 한 말을 전하고 싶다는 쥰의 간절한 진심이 있었겠지.  


우리의 삶에도 영화와 같은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줄 영화적 순간이 필요하다. 그 순간은 극적으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야 할지도 모른다. 신기루를 목격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으니까. 일탈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는 쥰에게 답장을 쓴다.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윤희 역시도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차분하게 써 내려간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언젠가는 윤희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용기가 생기겠지. 윤희를 응원하는 마음에는 우리도 현실에서 신기루를 목격하고 싶은 소망이 담겨있다. 우리도 윤희처럼 마음속 그대에게 용기 내어 말한다면, 혹시라도 현실이 영화가 될까?.. 나도 가끔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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