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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12. 2020

영화 <반도>는 정말 <부산행> 반도 못 따라갈까?

영화 <반도>_장르 변칙성의 진화 가속도

영화 <반도>가 개봉하고 감독의 전작 좀비물인 <부산행>의 질적 수준에 반도 못 미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언론 매체와 유튜브 영화 채널은 누가 <반도>를 더 잘 까내리는지 시합을 하듯, 소문을 확증해주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화를 본 관객들도 작품에 적잖은 실망감을 느꼈는지 비판하는 기사와 콘텐츠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영화에 대한 저평가를 관객 탓으로 돌려버리는 감독의 인터뷰는 기름을 부었고, <반도>는 여러 모로 대중을 실망시킨 영화임이 분명해져 갔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에 '배우'가 크게 작용하기에, 강동원이 주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명분이 충분했다. 많은 대중들은 <반도>를 두고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으로 인식하겠지만, 나에게는 강동원 배우의 차기작으로 일반 대중과의 기대치가 다르다. 그래서였을까, 당황스럽게도 나는 영화를 꽤나 재미있게 보았다. 배우 강동원의 예술적 얼굴과 현란한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고, 좀비 미장센 속에 섞인 강동원이란 피사체가 그림적으로도 자못 흥미로웠다. 영화적 만듦새로 보더라도 온 매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고 뜯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영화 <반도>에 대해 세간에 나오는 비판 지점들을 중심으로 진정으로 변명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영화 <반도>의 비판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개연성과 신파다. 먼저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인데, 여기에는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도 같다. 혹자는 <반도>의 세계관(영화적 배경 설정)부터가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부산행>에서 구축된 K좀비의 특징, 즉 빠른 움직임과 사람을 물어 감염시키는 능력 정도로 단 몇 시간에 반도를 점령했다는 영화적 설정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10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대한민국이 고작 저능 수준의 공격력을 보이는 K좀비를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비말 감염 정도의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으면 모를까,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떨어지는 설정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만의 리얼리티를 구축한다. 영화적 설정은 감독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세계관으로 너그럽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화도 하나의 예술이고 감독이 상상한 창작물인데, 너무 현실의 논리로 영화의 세계관을 설명하려 드는 것은 가혹하다. 물론 영화 속 배경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면 더 좋겠지만, 감독의 개인적 상상이 과도하다고 해서 개연성 부족으로 연결 짓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나의 관점에서 개연성 부족이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와중에 각 사건에 연관성이 부족하거나 우연적 사건이 남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 시작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에 있어서 논리적 결함은 응당 영화적 리얼리티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좀비에게 점령당한 반도를 돈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찾는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그 위험한 곳을 주인공이 다시 찾는다는 설정에 동기가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나는 몇십억이란 돈만으로도 충분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영화가 개연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소리에 민감한 K좀비를 상대로 초반 강동원 일행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장면은 의아하고, 이정현이 부상을 당하는 자신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미리부터 강동원에게 자신의 딸들을 부탁하는 장면은 작위적이다.


무엇보다 좀비물이라는 장르에 비해 좀비를 활용한 서스펜스나 서사적 긴장감이 약하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주요 인물이 좀비에게 공격을 당해 좀비로 변한다든지, 좀비의 능력이 진보되어 주인공들이 위험에 처한다든지 좀비물 특유의 스릴감이 부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서사의 중심에 좀비가 배제되어있다는 것도 분명한 흠결이다. 그러나 이는 <반도>가 좀비가 나타난 지 4년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좀비가 국가를 점령하는 과정보다도 그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즉 <반도>는 좀비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의 서사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좀비에 의해 몰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망한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미장센도 그럴듯했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 서로가 대립하고 싸우는 이기적 면모도 수긍이 갔다. 특히나 좀비 숨바꼭질을 벌이는 장면은 인간의 잔인함과 퇴폐성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꽤 흥미로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좀비의 서스펜스는 부족했지만 인간의 만행에 대한 긴장감은 일정 부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 전체에 걸친 총격씬이나 카체이싱 장면 등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나름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 볼거리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관객은 <반도>를 좀비 영화로 인식하고 극장을 찾았다. 더구나 감독의 전작인 <부산행>에 열광했던 관객들이고, 이후 쏟아진 한국형 좀비물 <창권>, <킹덤>, <살아있다> 등의 작품을 보고 온 관객들이다. 좀비 장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풍부하고 보는 눈이 높아진 관객들이다. 좀비물의 장르적 특성에 있어서 전작 혹은 동일 장르의 작품과 비교하여 진일보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다른 볼거리와 장르적 쾌감을 구축하고 있더라도, 관객이 기대한 좀비물로서의 새로움은 부재하기에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장르는 관습과 변형을 교차하며 발전한다. 관객은 장르영화에 있어 익숙함을 전제하면서도 기존의 장르물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갈구한다. 이중적인 요구이며, 충족시키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러나 관객을 만족시키는 웰메이드 장르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객의 이중적 요구인 관습과 변형, 즉 전형적 양식 위에 새로운 실험과 창조성을 더하는 창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반도>는 전형적 양식을 잘 답습한 장르영화는 맞지만, 새로운 변형을 시도한 장르물은 아니다. 편을 들어주고 싶지만 아니 건 아닌 거다.  


신파에 대한 지적도 이러한 장르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파도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극적 양식이라는 하나의 장르성이라고 간주한다면, 시기에 따라서 관객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시대별로 선호하는 장르가 달라지듯, 신파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가령 관객은 <국제시장>, <신과 함께>가 보여준 신파에 눈물의 호응을 보여주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 두 영화가 영화적 짜임새가 완벽하지 않았지만 천만 관객을 달성한 데에는 신파성이 자리한다고 말이다. 신파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시대적 때와 영화적 타이밍만 맞춘다면 극적 시너지를 올리는 적절한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반도>는 때와 타이밍면에서 신파를 잘못 사용했다. 중후반까지 재밌게 본 나로서도 갑자기 울며불며 눈물을 짜내는 배우들을 보며, 억지 감동에 하품이 나왔다. 더구나 지금의 관객들의 코드는 신파를 불호하고 있다. 감독은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작인 <부산행>에서도 잘 먹혔던 신파였기에, 관객이 환호할 요소라고 생각했을 터다. 애석하게도 관객의 코드는 과거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신파는 몇 년 만에 한물 간 코드가 되었고, 감독은 민감하게 캐치했어야 했다. 관객이 장르영화에 기대하는 새로움의 척도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관객의 변덕이 심해졌으니 창작환경이 어려워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중의 사랑을 갈망하는 장르영화 감독이라면, 변화된 관객의 코드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진화시키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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