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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08. 2020

단 하나의 쇼트가 갖는 힘

영화 <군함도>의 상징적 이미지

때론 이야기보다 이미지가 울림을 준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을 때 쏟아졌던 혹평을 기억한다. 역사 왜곡 논란부터 국뽕 논란, 개연성이 떨어지는 스토리라인, 극 전개와는 무관한 다소 오글거리는 촛불 장면, 그리고 빠지면 섭섭할 신파까지 국내 관객들의 준엄한 비판이 일었었다. 영화보다 예고편을 더 재밌게 본 나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대개 공감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 <군함도>에 대한 변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인상적 이미지 때문이다.


나의 지론에 있어서 영화는 이미지다. 너무나 당연해서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영화는 태생부터 이미지로 시작했고 그다음에 이야기가 달라붙었다. 현대 대중영화는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빈약하더라도 이미지 구성이 훌륭하다면, 특히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는 판타스틱한 이미지가 있다면 그 또한 명작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는 이미지로 말을 하고, 관객의 마음에 문을 연다. 영화 <군함도> 역시 단 하나의 이미지로 관객에게 밀물 같은 흥분감을 불어넣는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넓게 펼쳐진 욱일기가 한인 강제징집 노동자에 의해 반으로 절단되는 쇼트. 고정된 프레임 안에 단 몇 초의 시간을 담은 욱일기 절단 숏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보는 이에게 어디서 오는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이 욱일기 절단 이미지는 관객에게 관념적인 무엇을 던져주며,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주체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관객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프레임 안을 채우는 욱일기와 한인 노동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 관객들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언어로는 전달될 수 없는 이미지만이 할 수 있는 말,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이미지의 강렬함의 근원은 아마도 상징의 파괴(우상파괴와도 같은)가 몰고 오는 전복의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미첼은 우상 파괴를 가리켜 창조적 파괴라 일컫는다. “우상파괴는 단순한 이미지 파괴 이상이다. ‘목표’ 이미지가 공격받는 순간, 손상 혹은 전멸이라는 이차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즉 <군함도>의 욱일기 절단 이미지는 상징성의 파괴, 창조적 파괴의 힘을 기반으로 강렬한 관념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욱일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탐욕으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침탈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욱일기는 피의 역사에 중심에 있었다. 욱일기는 당시 전쟁을 벌이던 일본 군인들에게 군기의 증강과 살상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암묵적인 존재였다. 설사 현재의 욱일기가 과거에 사용되었던 목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침략, 야욕, 수탈, 식민 등의 일본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피해를 본 국가의 입장에서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혼재되어 다가오는, 그리하여 보는 것만으로 다시금 피의 역사 한 복판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악의 상징물이다.


이러한 상징성이 담긴 욱일기가 반으로 찢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숏 안에 피사체인 욱일기와 인물들이 들어온다. 가변적인 시간에 맞춰 접혀있던 욱일기는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넓게 펼쳐진다. 특정한 인물이 도구를 이용하여 욱일기를 가로질러 가면서 절단한다. 욱일기는 반으로 잘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이때 카메라는 펼쳐진 욱일기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다가, 누군가의 절단이 시작되자 위로 패닝 하여 욱일기를 잡고 있던 인물들까지 드러나게 보여준다.


공간과 시간의 한정 속에서 피사체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특정 피사체인 욱일기의 파괴를 나타낸다. 특히 카메라의 이동을 통하여 운동성을 부각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인 한인 징용자들의 힘으로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의미를 부여한다. 아마도 욱일기를 절단하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일본 제국주의가 피해자들의 계몽‧단합으로 인하여 허물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변적 시간을 활용하는 영화 매체만의 특성을 통해 단순히 절단된 욱일기의 전‧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절단되는 과정을 세밀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살아있는 생동감과 현장감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에게 스펙터클함을 안겨주고, 욱일기가 상징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 숏은 욱일기가 가리키는 군국주의의 파괴, 나아가 탈식민화, 동북아 평화로 연결되는 거대담론을 함축한다. 아직도 식민 야욕의 헛꿈을 꾸고 있는 듯, 일본은 자국의 헌법까지 고쳐가며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준비한다. 영화는 일본의 헛꿈이 반으로 잘려 땅바닥에 떨어진 욱일기의 모습처럼 그 말로가 처참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미지 속 관념의 예술화는 세상의 변화를 꾀하고,


욱일기로 상징되는 일본 제국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의 역사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또다시 일본은 제국주의를 향한 행보를 계속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관한 일련의 역사적 맥락을 아는 관객이라면, 욱일기가 반으로 잘리는 이미지를 보고 카타르시스, 정신적 영감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군함도>의 상징적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실상, 그리고 과거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등의 역사전쟁을 펼치고 있는 현 일본의 세태를 향한 묵직한 경고를 날린다. 나아가 제국주의의 종말과 탈 식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한‧일 역사와 관련된 관념을 하나의 숏에 담아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군함도>의 이미지가 실현한 관념의 예술화는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희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군함도>의 상징적 이미지가 전달하는 관념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는 관객이 늘어난다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관객들이 이미지가 말하는 관념성의 실체에 다가서서, 군함도로 표상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폐해를 공감하고 피해자들을 곁에 선다면, 끝나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심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이미지에 담긴 관념이 관객의 해석과 능동적 행동으로 확장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미지의 힘이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슬픈 역사에 대해 작은 위안을 만들고, 영화도 보여주지 못했던 해피앤딩을 현실이 보여주게 될 지도 모른다.

조금에 변화라도 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지, 영화의 힘은 발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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