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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25. 2020

현대판 계몽영화의 말로

영화 <강철비 2>_ 이런 애국영화 또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애국자입니다. 대한민국 땅에 사는 사람 중에 애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스스로를 매국노라 표방할 과감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국가 대표가 매달을 따면 내일처럼 기뻐하고, 영화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 국뽕에 취해 황홀해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빛내야지 다짐하기도 합니다. 국가는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만의 외사랑을 가슴에 품고 설레곤 합니다.


이런 애국자인 저는 이상하게도 애국영화에는 그다지 감흥을 못 받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을 존경하지만, 시종 무게만 잡다가 폭발씬으로 얼버무린 영화 <명량>의 천만 관객 소식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호국영령을 기리지만, 솔직히 영화 <연평해전>을 영화적으로 높이 평가하진 않습니다. 물론 두 영화에 담긴 애국심과 메시지는 이해합니다만, 저는 영화에서까지 평소 애국하는 저의 마음을 고취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의 마음이 심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 편의 영화의 흥행성적에 이견을 달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국민 여러분의 순수한 애국심을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상업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현실에 애석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 그 계보를 잇는 대작이 나왔습니다. 바로 <강철비 2>입니다. 사실 저는 남북 정예요원들의 케미스트리를 담은 영화 <강철비>를 나름의 신선함을 더한 첩보물로 평가하며 재밌게 보았습니다. 또한 감독의 전작인 영화 <변호인>에 누구보다 감동을 받은 관객입니다. 영화 선택에 있어서 감독을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강철비 2>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예고편을 보고는 단번에 불호하는 애국영화란 사실에 주저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같은 감독이 맞는지 의아함이 들 정도로 실망했습니다. 아무래도 감독이 최근에 국뽕을 너무 많이 맞으신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해봅니다.


제 책의 콘셉트가 영화의 편에서 변명을 해주는 것이라, 이 영화를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편을 들어줄까 고심을 해봤습니다.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떠오르는 전략은 '계몽영화'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계몽영화, 대중을 일깨우기 위해 사상을 주입하고 의식을 계도하려고 만든 영화를 가리킵니다. 극의 이야기를 통해서 대중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전달하는 아주 훌륭한 영화들이지요. 영화 <강철비 2>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계략을 비판하고, 한반도 평화 통일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아주 훌륭한 메시지를 담은 딱 더할 나위 없는 계몽영화입니다.

문제는 계몽영화가 성행을 했던 때가 초기 한국영화 시절이란 사실입니다. 지금은 전근대적인 의식을 개조해야 하는 1930년대가 아니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척결하려는 반공영화가 활성했던 1960년대가 아닙니다. 영화를 통해서 대중을 가르치겠다는 문제의식이 2020년의 영화계에 여전히 자리한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 물론 영화는 현실을 담고, 현대의 담론을 영화의 메시지에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직접적으로 주입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은 계몽영화의 구식스런 미학이나 다름없습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한 대통령'(정우성 분)의 입을 빌려 휴전 협정에 대해 설명하더니, 평화 협정의 필요성, 일제 식민 통치의 과정, 독도 영유권의 역사적 사실 등을 차분하게 구체적으로 설파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인지, 역사 분야의 일타 강사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역사 교육을 듣고 있는 건지 자괴감이 듭니다. 아무리 공교육이 나락에 떨어졌다지만, 왜 영화를 통해서 역사 교육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통한 역사 교육에 공을 들이다 보니 정작 신경 써야 할 영화적 짜임새는 어울리지도 않는 김정은 분장을 하고 어색한 북한말을 하는 '유연석'(북 위원장 역)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첩보물의 스릴감은 종적을 감췄고, 각 국 정상들이 납치가 되는 과정은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잠수함에서 정상들이 탈출하거나 일본 잠수함이 격추를 시도하는 장면은 그 자체가 클리셰로 눈곱만큼의 긴장감도 형성시키지 못합니다. 코미디 요소라고 넣은 것은 고작 트럼프 같은 미국 정상의 똥과 냄새입니다. 저도 원초적인 코미디를 좋아하지만, 그전까지 영화가 싸지른 필연성의 똥이 더 크다 보니 웃음이 나질 않습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영화 종반부와 에필로그입니다. 주인공이 탄 잠수함이 격추될 위기에 순간에 어디선가 극적으로 날아온 어뢰가 나타나 잠수함의 폭발을 막습니다. 대한민국의 잠수함이 이들을 구출하러 온 겁니다. 영화 내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구출하러 나타난 것일까요? 정말 '영부인'(염정아 분)과 '부함장'(신정근 분)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요? 이 영화가 이제 복음까지 전파할 요량인가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봤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영화적 개연성과 완성도는 어디로 갔는지, 흡사 영화 <우주 전쟁>의 결말을 보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빠지면 섭섭할 신파까지 넣었습니다.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나라 걱정에 눈물의 당부를 하는 대통령과 갑자기 외손주 타령을 하는 부함장을 보고 있노라면, 들끓는 애국심과 가족애에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그 오그라드는 장면을 살리는 배우 신정근의 연기만이 그나마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평화협정을 맺은 남과 북의 정상이 서울에서 만나는 에필로그 장면은 히트입니다. 바쁘신 분들이라면 이 에필로그만 보시라고 감히 추천드립니다. 영화의 메시지와 재미가 함축되어 있는 명장면입니다.


한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여놓습니다.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왜일까요? 영화 보면서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도 평화를 사랑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합니다. 평화와 통일이 판타지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목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결연한 표정을 한 정우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클로즈업 쇼트는 마치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정우성은 관객에게 말합니다.         



이제 제가 국민 여러분께 묻습니다!
국민 여러분, 통일을 하실 겁니까?


거룩한 말씀에 실소하여 죄송합니다만, 마치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먹이를 먹여주듯 영화의 메시지를 떠먹여 주는 것 같아 진심으로 손발이 닳는 기분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존중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질 낮은 영화의 생산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높이 평가하지만,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게으른 창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애국영화? 영화의 메시지? 다 좋습니다. 다만 그런 영화를 만들더라도 창작자의 양심이 있다면, 영화적 짜임새와 재미도 고려해주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제가 외려 관객들에게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관객 여러분, 국뽕 영화 계속 보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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