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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14. 2020

트랜스아이덴티티 캐릭터Ⅰ

영화 <친절한 금자씨>_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누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복수와 용서 사이를 횡단하다


금자의 정체성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금자는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 불리면서도 ‘마녀 이금자’라는 별명을 물려받는다. 누구나 친절한 금자씨를 도와주고 싶어 했고, 누구도 마녀 이금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처럼 금자는 ‘친절한’이 수식하는 선(善)인과 ‘마녀’로 대변되는 악(惡)인 사이를 횡단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화의 복잡한 서사구조는 선과 악, 두 성질을 끊임없이 횡단하는 금자의 복잡한 정체성을 조명한다.


금자는 ‘백선생’(최민식 분)의 ‘좋은 유괴’라는 해괴한 논리에 꾀어 ‘나쁜 유괴’에 가담하게 된다. 백선생은 유괴한 아이 ‘원모’를 죽이고는 자신의 죄를 금자에게 뒤집어씌운다. 금자의 딸아이를 유괴해 자기의 죄 값을 대신하지 않으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백선생의 협박은 금자를 선과 악이라는 대립항의 기로에 세운다. 결국 금자는 백선생의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13년 동안 백선생에 대한 복수를 욕망하며, 악인으로의 정체성 전환을 준비한다.



그러나 13년간의 복역 생활 동안 금자는 자신의 정체성 전환 계획을 완전하게 은폐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있는 천사를 자청하며 친절한 금자씨로 살아간다. 이태리타월로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기도를 하고, 제 몸을 희생하여 교도소 동기들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수에 대한 밑그림이다. 금자는 동기들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복수에 이용하고자 한다. 금자의 선행에는 복수라는 욕망이 자리한다.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는 금자의 얼굴 어디에도 친절함은 남아있지 않다.


“너나 잘하세요”



금자의 냉소적 한마디는 마녀 이금자의 탄생을 선포한다. 금자의 정체성 전환은 영화 속 다양한 장치로 표상된다. 우선 금자의 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무늬 원피스는 정체성 전환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된다. 빨간 하이힐, 블루 계열의 트렌치코트, 선글라스 등 마녀 이금자의 패션은 한층 세련됐다. 백선생을 처단하기에 이르러서는 검은색 가죽 자킷을 입는데, 흡사 전사의 모습으로 보인다. 금자의 의상이 촌스러움에서 화려함으로, 컬러풀한 색에서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정체성이 전환되고 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완성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빨간 눈 화장도 그러하다. 금자는 친절하게도 눈 화장을 짙게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친절해 보일까 봐”


금자의 자기 고백적 대사는 정체성 전환의 선언과도 같다. 친절함으로부터 탈피하여 악인으로 변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의 표상은 금자의 얼굴이다. 얼굴은 개인의 외양과 내면을 매개하는 표피로 내면적 정체성 전환이 표상되는 공간이다.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로 살아가던 때와 출소 후 마녀 이금자로 변신한 직후의 얼굴은 큰 차이가 있다. 맑고 화사한 얼굴과 어둡고 처연한 얼굴의 대조가 극명하다.

   


한편, 금자는 복수를 실행에 옮기면서도, 천사 이금자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횡단한다. 희생당한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바치며 용서를 구한다. 실상 유괴에 가담한 죄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입양을 가게 된 자신의 딸에게도, 죽은 원모의 영혼에게도 용서를 빈다. 금자는 복수와 용서라는 대립의 경계에서 양면성의 행태를 보인다. 금자는 자신의 원한보다는 원모에 대한 죄의식, 즉 속죄를 위해 복수를 욕망한다. 그렇기에 금자가 복수를 위해 악인으로 정체성을 전환하는 것은 원모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용서를 위한 복수, 복수를 욕망하는 것이 속죄의 방법이 되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금자가 복수를 욕망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부정이지만, 속죄하는 마음으로 희생자들의 원한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성을 내포한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절대 악인 백선생을 안 죽이는 것이 양심의 가책인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금자는 복수와 용서,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 가치의 경계 사이를 횡단할 수밖에 없다. 금자는 속죄하기 위해 복수에 가까이 갈수록, 선과 악이 뒤엉키며 충돌하는 야누스의 얼굴이 되어간다. 결국 그녀는 끝내 구원받지 못한 괴물로 남는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아름다운 여자의 잔인한 복수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유일하게 여성 복수극을 그린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가 그리는 복수가 서늘함이라면,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뜨거운 복수였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여자의 복수를 다루는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를 내세워 어떤 느낌의 복수를 보여주려 했을까? 추측하자면 아름다운 복수극이다. 영화는 미장센 전반에 바로크 음악과 예술 장식을 배치한다. 바로크 예술의 미학은 금자의 아름다운 복수극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에 일조한다.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

 

금자의 말처럼, 그녀는 복수도 예쁘게 한다. 예쁜 은장식이 달린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고, 피해자의 가족들과 함께 백선생을 처단하고 예쁜 케이크를 반듯하게 잘라서 나눠먹는다. 그렇다고 금자의 복수가 어리숙하거나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전작들의 복수만큼이나, 외려 더 치밀하고 잔인하다. 금자는 13년간이나 자신의 정체와 계획을 은폐한다. 금자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도 교도소 안에서 살인을 한다. 금자는 교도소 동기들을 자신의 복수 계획에 끌어들이고, 어느 동기의 경우는 백선생과 위장결혼까지 시킨다. 또한 백선생을 감금한 뒤, 피해 아이들의 부모를 모두 불러와 백선생을 어떻게 죽일지 난상토론을 하며, 이를 백선생에게 생중계로 들려준다. 금자의 예쁜 복수는 진취적이며 잔혹하다.  


씨네 21은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욕설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복수가 잔인하면 잔인해질수록, 속죄를 하면 할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우아해지는 역설을 실험한다”고 평가한다. 우아함의 역설, 이를 실천할 배우는 이영애밖에 없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배우 이영애의 이미지와 연기력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특히나 이영애가 브라운관을 통해 쌓은 절대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TV광고의 한 카피 문구는 단번에 이영애를 ‘산소 같은 여자’로 만들었다. 드라마 <대장금>의 단아한 매력까지 더해지며, 이영애는 한국적인 여성미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다.

조안 홀로우즈는 영화와 스타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스타의 이미지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지닌 일련의 기호들에서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영화의 내러티브 장치들이 나타내는 기호적 의미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로 대입되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와 이미지는 곧 배우에게 대입되어 특정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한다. 관객은 이를 소비하고, 관객의 기대를 반영하여 다시 작품이 제작되는 시스템은 배우의 상품적 가치를 높여준다.


이영애는 여성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영화 <선물>, <봄날은 간다> 등의 멜로물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이러한 이영애가 갖고 있는 특유의 여성성은 친절한 금자씨일 때 절정의 시너지를 발휘한다. 따라서 금자는 교도소 동기에게 쌍욕을 해도 우아하고, 밥에 락스를 타 먹여 사람을 죽여도 성(聖)스러워 보인다. 배우 이영애의 깨끗하고 선한 이미지가 친절한 금자씨에 투영되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마녀 이금자로 정체성이 전환된 이후에 관객은 이영애의 낯선 얼굴과 조우하게 된다. 짙은 눈 화장이 대변하는 괴기스러움, 심드렁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남성 괴한들을 격렬한 몸싸움 끝에 죽여 버리는 흡사 전사와 같은 모습 등은 기존 이영애가 가진 여성성의 이미지를 굴절시킨다. 배우 이영애가 지닌 여성성의 전복, 이미지 역전은 금자씨의 정체성 전환의 간극을 극대화한다. 페르소나 이영애가 지닌 이미지를 차용하고 역이용하여, 금자의 캐릭터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금자야 눈 화장이 그게 뭐야”


백선생이 감금되어서 금자에게 하는 말은 배우 이영애의 전복된 이미지에 당혹했을 대중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금자는 복수를 욕망하며 친절한 금자씨에서 마녀 이금자가 되는 정체성의 전환을 보여준다. 배우 이영애는 자신의 페르소나의 균열을 일으켜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전복시켜버린다. 금자도 이영애도 자신의 정체성을 거스르는 모험을 감행했기에,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 킬 수 있었다. 우리는 양단의 성질을 횡단하는 두 야누스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복수를 목도하게 된다.


아마도 관객은 트랜스아이덴티티를 욕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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