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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03. 2020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영화 <한공주>가 현실을 다루는 방법


영화는 본래 현실을 담는다. 강성률은 영화는 현실의 구경거리이며, 그 구경거리를 영화 스토리에 집어넣어 허구로 창조한다고 말한다. 즉 영화의 허구성 안에는 현실이 담긴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실화 영화는 실존했던 인물이나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다루면서 현실을 보여준다.  TV 속 뉴스의 한 꼭지, 한 줄의 신문기사, SNS상의 개인적인 글귀 등,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 모든 것들이 텍스트가 되어 영화의 스토리가 된다.  


영화 <한공주>는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하 밀양사건)을 소재로 하는 실화 영화다. 밀양 사건은 밀양에 사는 어느 여중생이 고교생 집단에게 잔인하고 꾸준하게 성적학대를 받은 사건이다. <한공주>의 감독은 학교폭력, 자살과 같은 문제를 지켜보는 3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창작 소회를 밝혔다. 이처럼 <한공주>가 담는 현실 텍스트는 밀양사건으로 표상되는 학교폭력, 청소년 자살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현대 사회의 시선을 포괄하는 사회문제 전체를 가리킨다. 작금의 현실이다.


단편적 사건을 사회적 문제로 확대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는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공주>의 주요 서사는 현실 텍스트인 밀양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 피해자의 삶이다. 밀양사건을 단지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치부했다면 비극을 겪게 되는 주인공 ‘공주’(천우희 역)의 스토리를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사건 이후의 공주의 삶을 그리고 있고, 자연스레 공주의 삶을 막아서고 유린하는 사회의 모습을 담아낸다. 개인의 비극보다는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비극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성폭행 피해자인 공주는 경찰관에게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수사를 받고, 가해자의 학부모들로부터 합의서를 빌미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사는데, 피해를 받은 학생은 학교를 떠나 전학을 가야 한다. 사건의 트라우마는 앙상한 공주의 몸에 들러붙어 다니고, 공주는 좋아하는 노래를 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은 꿈마저 뻔뻔스런 가해자의 학부모들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힌다. 가해자의 학부모들이 공주가 전학 간 학교까지 찾아와 합의를 해달라며 지난 사건을 들춰내고 공주를 유린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현 사회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가 방치되고, 멀리 떠나 숨 죽여 살아야 하고, 사건이 까발려질까 봐 마음을 졸여야 한다. 가해자들이 겪어야 할 일련의 책임을 오히려 피해자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르는 모순된 상황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나오는 공주의 첫 대사인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와 교묘하게 어우러지며 부조리한 대한민국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한공주>는 밀양사건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외려 사건의 실체를 숨기다가 중·후반부에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사건을 플래시백 형태로 처리하여, 공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드러낸다. 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하기보다는 플래시백 효과에 기대어 사건의 실마리만을 제공하여 관객의 관심을 끄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독의 의도된 연출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밀양사건은 사실 사건의 잔인함과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중첩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민감한 사건이다. 제삼자인 관객 역시 아무리 영화라 할지라도 보기 불편할 수 있다. 사건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선택한 것은 감독의 배려이다. 이는 관객에게 거부감을 덜어주고, 밀양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사건에 담긴 무거운 함의를 전달한다.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는 서사 구조


<한공주>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 덩어리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공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과거 공주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된 서사는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공주의 삶을 조명하며, 성폭행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공주의 여정을 그린다. 여기에 과거의 스토리가 마치 난도질당한 천 조각처럼 여러 개의 시퀀스로 재단되어 중간중간 끼어져 얽힌다. 이 시퀀스들의 개입은 돌출적이고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져서 주 서사의 흐름을 상당히 방해한다. 관객들은 주된 서사에 쉽게 몰입하고 이해하다가도, 난데없는 과거 시퀀스에 가로막혀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관객들은 영화의 서사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 이야기 단위를 재배열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중적 서사구조의 불친절함은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에 역할을 한다. <한공주>가 품고 있는 현실 텍스트는 끔찍한 사건이고, 사건을 겪은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건의 잔인함,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 사회의 삭막함 등 복잡하고 어지러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영화가 친절하고 단편적인 서사구조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규칙적이고 복잡한 서사의 변칙성은 공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대변하기도 하고, 영화 속 불친절한 세계에서 공주가 느꼈을 환멸감에 감응하게 한다. 관객은 공주를 공감하기 위해서라도 주체적으로 퍼즐처럼 놓인 이야기 구조를 이해하려 든다.


채우는 화면

<한공주>의 영상 미학의 특징 중 하나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등장이다. 유독 공주의 얼굴을 비출 때 클로즈업 숏이 많이 쓰이는데, 영화의 미장센을 표현하는데, 배우의 얼굴만큼 훌륭한 피사체는 없다. 배우의 미간에 잡히는 주름살 하나, 동공의 커짐, 파르르 떨리는 얼굴 근육 등은 그 어떤 화려한 소품보다도 최고의 미장센을 만들어 준다. 

더불어 클로즈업은 대상을 영화적 시공간의 제약에서 탈주하게 하고, 관객의 시선을 대상에 집중하게함으로써 의미를 발산한다. 클로즈업이 만들어내는 의미 강조와 특정한 시간의 머무름은 관객에게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구축한다. <한공주>가 보여주는 얼굴 클로즈업 장면들 역시도 관객들에게 어떠한 성찰의 지점을 제공한다.  


가장 인상적인 공주의 얼굴 클로즈업은 새로운 학교에 처음 방문하는 씬에서 나온 숏이다. 전학을 오게 될 학교를 방문한 공주는 교무실 앞에 서서, 장식장 안에 트로피들을 구경한다. 아마도 학교 수영부에서 수상한 트로피로 추측되는데, 트로피들을 바라보는 공주의 얼굴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설렘이 스쳐 지나간다. 희망적 순간도 잠시,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이는 스템플러 소리에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한 얼굴을 통해 우리는 공주의 설렘이 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게 되지만 공주를 놀라게 한 스템플러는, 공주를 성폭행했던 남학생들이 사용한 학대 도구와 모양이 비슷하다. 스템플러로 표상되는 피의자 학생들과 성폭행 사건의 기억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공주를 끝까지 괴롭힐 것을 암시한다. 화면 가득 찬 놀란 표정을 한 공주의 얼굴이 이를 반증한다. 이 외에도 공주의 클로즈업 숏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새로운 안식처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의 체념한 얼굴, 과거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괴로워하는 얼굴, 전학 간 학교까지 찾아와 괴롭히는 피의자 학부모들로 인해 절망하는 얼굴 등 다양한 클로즈업 숏은 공주의 감정과 공주가 처한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공주의 얼굴은 현실 텍스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공주가 피해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공주의 얼굴은 밀양사건의 실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커다란 스크린 속에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공주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영화 속 사건의 잔인함과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한공주>는 현실 텍스트를 인물의 얼굴에 빗대어 클로즈업의 형태로 전달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공주에게 공감할 시간을 주고 영화 속 사건과 이를 둘러싼 영화 속 세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는 실제 사건과 현실 세계의 성찰로까지 귀결시킨다.


스크린에 가득 채워진 공주의 얼굴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이미지가 되고 영화가 말하려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 섬세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공주의 얼굴만으로도 프레임 안은 부족함 없이 가득 찬다. 장황한 대사나 웅장한 음악이 없어도 영화의 발언,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충분하다. 공주 얼굴의 클로즈업 숏은 그 어떤 요소들보다도 훌륭한 채우는 화면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비우는 화면


채우는 화면과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 비우는 화면도 있다. 비우는 화면은 의미 전달을 위하여 대사나 소리 등으로 화면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어냄으로써 여백을 만들어 관객에게 해독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을 말한다. 덜어냄의 미학을 보여주는 비우는 화면은 의미의 여백을 관객 스스로가 채우기를 요구한다. 비우는 화면은 여운을 남기는 만큼 관객이 해독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여러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채우는 화면보다 심도 있는 의미의 장으로 관객을 몰아넣을 수 있다.    


엔딩 시퀀스에서 공주는 가해자들 부모의 패악과 주변인들의 외면에 홀로 남게 되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 한강 다리에 이르게 된다. 공주의 마지막 여정을 여행 가방이 함께한다. 여행 가방은 공주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등장해서 공주의 마지막 모습인 엔딩 시퀀스까지 등장하며 유일하게 공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 마지막 결심을 한 공주가 차도 옆 쓸쓸한 길을 걸을 때, 묵묵히 뒤따르는 여행가방의 모습을 꽤 긴 시간을 할애하며 클로즈업 숏으로 보여준다. 터덜터덜 끌리는 여행 가방을 보며 우리는 공주의 처량함과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자의 황망함을 느낄 수 있다.


곧이어 이어지는 한강 다리 위에 덩그러니 놓인 여행 가방을 비추는 씬. 여행 가방이 공주를 상징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공주가 다리 위에서 삶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여행 가방을 비추는 시선이다. 카메라는 다리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통해 보이는 여행 가방을 잡는다. 버스 안에 승객들의 시점으로 여행 가방을 보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천천히 지나가는 버스에 따라 시선도 여행 가방에서 멀어지고, 여행 가방은 카메라 앵글 밖으로 사라진다.



여기서 시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죽음을 앞둔 공주보다는 공주의 죽음을 바라보는 제삼자들, 즉 공주를 둘러싸고 있는 현 사회의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 안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를 가리키며, 벼랑 끝에 몰려서 다리 위에 서있는 공주를 우리는 그저 바라보고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뒤이어 드넓은 강물에 물체가 빠진 듯 하얀 물보라가 이는 장면이 연결된다. 강물에 공주가 몸을 던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엔딩 시퀀스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공주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엔딩 시퀀스를 구성하는 각각의 씬들은 채우는 화면과는 거리가 있다. 단조로운 색감과 묵음에 가까운 음향, 강물과 주변 나무들의 이미지, 공주가 흥얼거리는 콧소리 등 씬의 프레임은 무미건조하게 그려지며 화면을 비운다. 하지만 상징물의 활용, 시점의 이동, 씬의 배열과 결합으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며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준다. 특정 사건의 문제점이 아닌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즉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씬, 강물에 빠진 공주는 물 위에 떠오른다. 차가운 현실과도 같은 강물은 세차게 공주를 삼키려 든다. 공주는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수영을 배울 때처럼 팔을 젓는데, 여기서 유일하게 의미를 채우는 장치인 공주와 친구의 대사가 등장한다. 비우는 화면 속에서 들리는 대사 소리는 관객들의 뇌리를 세게 친다. 공주가 컴컴한 강물 속에서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에는 휩쓸려 사라지게 되는 장면과 어울리며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공주야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 까 봐... 내 맘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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