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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n 09. 2018

빨간 대문 집

“레고로 만든 것 같아.”

둘째가 베트남의 집을 보고 한 말이다. 


베트남 가옥 구조는 앞이 좁고 뒤로 긴 직사각형이 전형적이다. 그런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그럴듯한 분석은 세금 문제다. 베트남은 대로에 접한 집의 폭을 근거로 세금을 책정한다. 토지를 공유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대로에 접한 집을 가지려면 집의 폭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세금을 줄이려면 대로에 접한 면을 가급적 줄여야 한다. 그로 인해 앞이 좁으면서 뒤로 길고, 위로는 높은 기형적인 형체가 된다.

 

내가 가본 집 중에 가장 긴 집은 단거리 트랙을 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아무리 길어도 보통 15m에서 20m가 기본인데, 그 집은 거의 50m에 육박했다. 3개의 집을 연결해서 그렇게 된 경우였다. 앞이 상점이었고, 가운데가 창고, 끝이 가정집으로 된 3단 구조였다. 마지막에 위치한 가정집은 중정을 안고 있어서 뻥 뚤린 하늘로 나무가 꽤 높이 자라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외부로 나가는 독특한 구조는 각각의 공간과 차별화되어 서있는 장소에 따라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건 창문과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과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대개 폭은 5m를 넘지 않고, 좁은 집은 2m가 되지 않는다. 흡사 닭장처럼 방과 계단만 달랑 놓여있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좁은 공간이더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상상력은 열악한 환경에서 빛을 발한다. 특이한 규격이 독특한 공간을 만드는 핵심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부상하는 협소 주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집 전면에 무척 신경을 쓴다. 치장도 앞면만 한다. 옆면과 뒷면은 페인트칠조차 하지 않는다. 또 기와를 옆으로 내지 않고 앞으로 향하게 한다. 언제 들어설지 모를 옆집에 대한 배려다.     


호치민에 신혼집을 마련한 것은 회사를 나온 2004년의 일이었다. 3군에 있는 아담한 3층 단독주택이었다. 시내 중심과 공항이 멀지 않았다. 그곳에서 1년을 살았다. 대문을 빨간색으로 칠해 동네 사람들이 ‘빨간 대문 집’이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이 기막힌 집이었다. 

당시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가 살았던 그 집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리는 변한 것이 별로 없었는데, 우리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길에 나와 있는 주민들이 낯선 외국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도 관광객의 왕래가 드문 지역이었다. 


찾아간 집 앞에서 우리는 당황했다. 모든 게 헷갈렸다. 대문은 짙은 녹색으로 바뀌었고, 도둑이 들었던 2층과 3층 난간은 폐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높이가 3층이 아니라 4층이었다. 옥상에서 사찰의 마당이 보였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내는 새벽마다 울리던 종소리는 기억했으나, 절의 위치를 떠올리지 못했다.


도둑처럼 집 앞을 서성이는데 앞집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 집은 골목 어귀에서 코코넛을 파는 아주머니가 살았다. 우리는 그녀를 ‘코코’라고 불렀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한 무리의 한국인 가족을 보고 그들이 길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막힌 길이니 돌아서 가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우리 몰래 옥상을 오가던 고양이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살던 집을 가리켰다. 

“10년 전에 저 집 대문이 빨간색이었죠?” 

여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나는 “이 집에 코코넛 파는 아주머니가 계셨죠?” 하며 안을 기웃거렸다. 여자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그녀의 표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창피했는지 막내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아내가 작은 소리로 이사 갔나 봐 중얼댔다.


우리는 도망치다시피 골목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떠올려보니, 그녀가 코코의 딸인 것 같았다. 어디 은행에 다니는 딸이라며 코코의 소개로 두어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코코가 없을 때는 직접 코코넛을 전해주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고 소용없지만, 처음부터 나의 질문은 잘못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곳에 살던 한국인 신혼부부라는 것과 지금은 아이 셋을 낳아 살던 집을 구경하러 왔다는 얘기를 했어야 했다. 뚱딴지 같이 빨간색 대문 얘기를 했으니 그녀가 알 턱이 없었다. 또 코코넛을 팔던 집이 어디 그 집뿐이었겠는가? 코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나는 그렇게 놓치고 말았다.


코코는 단지 코코넛만 파는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짧은 영어를 구사했던 그녀는 우리의 소식통이었다. 코코를 통해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을 수 있었다. 어느 집 자식이 사고를 쳤는지, 어느 집 남자가 바람이 났는지 알았다. 무엇보다 코코의 코코넛은 맛이 있었다. 코코넛은 작 익은 놈을 갓 땄을 때와 원래 종자가 좋은 놈이 맛있다. 그녀는 그걸 구분했다. 맛없는 코코넛은 있어도 아예 팔지 않았다. 더위에 지쳐 돌아온 우리는 집 앞에서 그녀의 코코넛으로 원기를 회복하곤 했다.


한 번은 코코가 늦은 밤 대문을 두드렸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팬티바람으로 달려 나갔다. 상기된 표정의 코코 옆에 정복 차림의 배불뚝이 공안 한 명 서있었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다짜고짜 내 이름부터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는 코코에게 통역이 되는지 물었다. 그녀가 난처해하자, 그는 다른 통역을 데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다행히 우리에겐 베트남어 선생이 있었다. 린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되도록 빨리 와달라고 요청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보다 길게 느껴졌다. 공안은 우리 부부와 코코를 나란히 앉혀두고 맞은편에 감시하는 자세로 앉았다. 내가 코코에게 슬쩍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불안은 금세 전염되었다. 나는 돈을 집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고, 코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앞에서 숙덕대는 꼴이 못마땅했는지 공안은 권총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이들 장난감이 아닌 진짜 총이었다. 겁박을 하려는 건지, 몸에 차고 있기 불편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시원한 음료수를 내왔다. 밑에 받친 쟁반이 덜덜 떨렸다. 공안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쓱 쳐다보더니 음료수에 손도 대지 않았다. 나만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20분 만에 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밤이라 전속력으로 오토바이를 몬 모양이었다. 한동안 많은 말이 오갔다. 공안은 패스포트와 집 계약서를 가져오게 하고 이런저런 것을 린에게 물었다. 코코에게도 뭔가를 확인했다. 공안은 1층부터 4층 옥상까지 개미를 찾듯 샅샅이 훑었다. 소화기가 어느 곳에 비치되어 있는지도 체크했다. 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들어올 때의 험악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공안은 나긋나긋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린에게 물어보니 거주인원을 점검하는 의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등록된 사람이 실제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그러면 확인만 하지, 왜 총을 꺼내고 지랄이야? 지랄이.” 

나는 이미 떠나고 없는 공안을 향해서 소리를 높였다. 그날 공안이 왜 그랬는지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차라리 돈을 뜯어갔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녘에 도로를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가 많아진 뒤에야 비로소 자장가를 들은 아이처럼 스르륵 잠이 들었다. 사는 동안 그런 일은 다시없었다. 다음날 만난 코코가 내게 공안을 대신해 사과했다. 

“총은 정말 너무 했어. 네 와이프가 놀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녀도 아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코코와의 기억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쉬움에 근처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단골이던 중국요리점이 남아있으면 요기나 하려고 했는데, 핸드폰 대리점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 집 불도장 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술에 재운 삭스핀에 버섯과 각종 해산물, 오골계를 넣고 푹 곤 것이 특징이었다. 넓은 밥공기 만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데, 땀을 많이 흘렸을 때 먹으면 보양식이 따로 필요 없었다. 


아쉬운 대로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있는, 바게트를 직접 구워 파는 반미 집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아이들의 얼굴이 더위로 곧 터질 판이었다. 째(chè)를 사준다는 핑계로 시장으로 향했다. 


아내는 시장에 도착하자, 신혼집 골목에서 느끼던 생경함을 벗어던지고 과거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꽃 파는 집, 항아리 가게, 채소가게, 정육점, 생선집, 모든 걸 기억해냈다. 아무래도 시장에서의 기억은 나보다 아내가 더 선명했다. 모든 게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닭을 잡아 팔던 집은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닭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아 털을 뽑아서 주는 집이었다. 처음엔 그 과정이 보기 껄끄러워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한 번 맛을 본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닭 집에 먼저 주문을 하고 장을 보러 자리를 피했다가 나중에 닭만 받아서 오는 방법을 터득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더니, 아내가 대뜸 13년 전의 새댁이 아직도 그 자리에서 채소를 팔고 있다며 한 여자를 지목했다. 내 눈에는 중년의 한 부인으로 보였다. 낯익은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한 차례 지나갔다가 다시 그녀 앞으로 갔다. 우리는 토마토를 고르는 척하며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아내는 확신했다. 

“눈썹 문신이 과해서 그래. 원래도 통통했는데 살이 많이 쪘네.” 

2018년

아내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녀와 흥정을 하면서 혹시 우리를 기억하느냐 물었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10여 년 전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처음엔 아리송해하던 그녀가 우리를 기억해냈다. 사나워 보이던 눈이 가늘어지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웃으니 그녀가 확실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딸린 아이 셋을 보고 놀라워했다. 


13년 전 그녀는 갓 결혼한 새댁이었다. 우리와는 채소를 팔고 사는 관계였을 뿐, 간단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13년을 그 자리에 있었을까? 아이는 있을까?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붙들고 있기에 그녀가 너무 바빴다. 그리고 아이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 세 놈이 달라붙어 어서 가지고 졸라댔다. 당장 째를 입에 가져다 대지 않으면 난폭한 폭도로 돌변할 상황이었다. 


아내와 나는 예전처럼 토마토를 사서 그 자리를 떴다. 그녀가 우리가족에게 손을 흔들었다. 반가웠다는 뜻인지, 다음에 또 오라는 뜻인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13년의 간격이 짧은 순간에 비처럼 훅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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