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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n 16. 2018

가방이 아닌 명품 터널,
구찌

베트남전 당시, 미 25사단은 사이공 서북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후방을 방어하면서 전선이 형성된 중부를 지원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단본부가 들어선 구찌(Củ Chi)는 터이닌과 빈롱 일대에 암약하는 베트콩(민족해방전선)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을 끼고 있어 전함을 작전에 편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밀림지대라 엄폐 은폐가 용이했고, 헬기 기동이 수월했다. 무엇보다 사이공과 가까운 것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미군은 부대 입지 선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대 안팎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숙소에 불이 붙는가 하면, 잠을 자던 병사가 타살되기도 하고, 탄약고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귀신의 농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야생에서 자란 마리화나와 대마초를 흡입한 사병들 탓이라고 생각했다. 마약 단속령이 발효됐지만 이런 기상천외한 일들은 줄어들기커녕 점점 더 자주 발생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더욱 마약에 빠져들었다. 미군들 사이에 괴담이 떠돌았고, 병사 일부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혼란에 빠진 미군 수뇌부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다각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이른바 구찌터널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그때였다. 우연찮게도 바로 땅 밑에 그들의 적이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의 정보부, 영국의 스파이도 모르던 일이었다. 구찌터널은 1940년대 프랑스와 싸우던 독립투사(베트남 독립동맹, 줄여서 월맹이라고 한다)들의 은신처였다. 그러다가 미군의 참전 계기로 베트콩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가만있지 않았다. 즉각 불 공격에 착수했다. 고엽제와 화염방사기로 밀림을 말리고 불태웠다. 하지만 적을 소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은 지하로 내려가지 못하고 쉽게 꺼졌다. 불로 되지 않자, 이번엔 물로 공격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그때 등장했다. 사이공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땅굴에 퍼부었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베트콩이라 할지라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주입된 물은 족족 감쪽같이 사라졌다. 땅굴의 배수가 어느 정도인지 미군은 알지 못했다.


미군으로서는 땅굴의 규모와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1966년 1월, 미군은 크림프(주름살) 작전을 개시하였다. 8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구찌 일대를 공격했다. 폭탄과 폭약으로 땅굴의 일부를 파괴하고 연결통로로 침입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간 벌인 이 공격으로 미군은 베트콩의 군수물자와 중요한 문서 일부를 손으로 넣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성과는 땅굴이 어떻게 조성되어 있는지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땅굴은 상상 이상이었다.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모든 통로는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입구는 배수를 감안해 골이 깊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요 지점마다 위장 통로와 함정을 만들어 외부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입구에 설치된 물웅덩이는 최루가스가 확장하지 못하도록 고안되었으며, 물이 없는 U트랩은 외부 폭격으로부터 압력이 최소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터널 측면 지지대는 흙과 대나무, 벽돌, 짚 등이 쓰였고, 천정은 튼튼한 나무의 뿌리를 활용하는 등, 자연물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속이 빈 대나무로 공기구멍을 내는가 하면, 빗물의 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나뭇잎으로 뚜껑을 덮었다. 

입구는 외부인의 침입이 까다로운 장소에 여러 개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식물들로 위장되어 베트콩이 아니고서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중 몇 개는 부비트랩이나 죽창이 꽂힌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 땅굴 주변에 각종 지뢰가 매설되었고, 몇몇 핵심 지점은 전투용 벙커와 곧바로 연결되어 언제든지 전투태세가 가능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울창한 숲과 강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퇴각용 땅굴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미군은 땅굴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먼저 병사들의 직접적인 땅굴 투입을 고려했다. 자원자에게 포상 휴가를 내걸고 수색에 참여할 병사들을 모집했다. 자원병들은 담배 필터로 귀를 막고 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손전등과 콜트 45 구경 권총만 들고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로프로 몸을 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땀범벅이 된 병사들이 제 발로 뛰어나왔다. 몇몇의 병사가 꽤 먼 거리까지 들어갔으나 그들이 땅굴 안에서 한 일이라곤 무릎에 피멍이 들도록 기어 다닌 것 밖에 없었다. 제대로 수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과 장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67년 1월, 세다 폴 작전을 발동하였다. 전면적인 화력을 총동원하여 땅굴 속의 베트콩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작전에는 호주, 뉴질랜드군까지 가세하였다. 1월 어느 새벽, 제1보병사단 대대 병력을 태운 60대의 헬리콥터가 구찌터널 위로 날아갔다. 이 작전은 매우 은밀하게 이뤄졌다. 기습을 위해 지원 포격도 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강제 이동시킨 후, 베트콩 섬멸 작전에 착수하였다. 제25보병사단과 제196보병여단이 서쪽 경계를 따라 기동 하였고, 제1보병사단과 제173공수여단, 그리고 제11기갑 기병연대는 동쪽과 북쪽 퇴로를 차단했다. 

 출처  rarehistoricalphotos.com

포위망이 완성되자, 이튼 날부터 공습에 들어갔다. 공습은 며칠간 이어졌다.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땅굴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것이 가루로 변하자, 공병들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폭약을 설치하여 땅굴 내부를 폭파해 나갔다. 전과가 쏙쏙 나타났다. 약 1만 m의 터널을 파괴하고, 4개 마을 27개소의 베트콩 집결지와 60여 개의 지하벙커를 폭파할 수 있었다. 미군은 구찌 일대에 거의 1만 파운드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군은 불도저로 땅을 평평하게 다져버렸다. 그렇게 사이공 서북쪽에 거대한 인공 사막이 만들어졌다. 


3주 동안 이어진 세다 폴 작전에서 베트콩 700명 이상이 사살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72명이 전사하는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내부에서 들어간 노력과 물량에 비해 성과가 미흡했다는 회의론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미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콩들이 터널을 원상 복구했다는 첩보였다. 이로써 세다 폴 작전이 완전한 실패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미국 언론은 ‘이 무식한 작전’의 책임을 군에 물었다. 그때마다 미군은 화풀이하듯 구찌 일대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불을 지르고 강력한 제초제를 다량으로 뿌려대며 다시는 이 땅에 생명체가 살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미 공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약 8백만 갤런의 고엽제를 공중 살포하였다.


세다 폴 작전의 실패로 자존심이 상한 미군은 새로운 전술 마련에 착수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처음 시도했다가 폐기된 ‘하수구 소탕작전’이었다. 왜소한 병사 600명을 차출해, 소위 ‘땅굴 쥐 Tunnel Rats’ 양성에 들어갔다. 두려움 속에서 어둡고 좁은 미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폐쇄 공포증이 없는 것을 물론이고, 체력뿐만 아니라, 강인한 정신력이 필수였다. 땅굴 쥐들은 부비트랩, 매복 베트콩, 독사와 해충, 부족한 공기 등 각종 위험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땅굴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방어, 수색, 부비트랩의 회피, 통신, 최루가스 극복, 어둠 속에서도 무기를 다룰 수 있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미 육군은 작전을 위해 땅굴 탐사용 특수 키트 보급을 본국에 요청했다. 30m 길이의 로프, 방탄복, 갈고리, M9 또는 Ml7 방독면, TA-1/PT 무전기, 장갑과 무릎패드, 6V 플래시 등이 포함된 키트가 지급되었고, 또 컴퍼스, 12V 플래시, 소음기가 장착된 22 구경 자동 권총, M7 총검, 탐색용 장대, M18 연막 수류탄 4발, M-25 CS 수류탄 12발, 무전기, 통신선, 야시경 등이 차례로 보급되었다.

Tunnel Rats 출처 www.stripes.com

이렇게 중무장한 땅굴 쥐들은 지하로 투입되었으나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쓰고 있던 방독면이 문제였다. 최루가스는 막을 수 있었지만 과도한 일산화탄소와 산소부족, 그리고 살인적인 무더위가 걸림돌이었다. 일부 땅굴 쥐들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해 베트콩들에게 중요한 군수물자를 제공해주었다. 수색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하나같이 탈진으로 쓰러지면서 지옥을 경험했다고 헛소리나 지껄여댔다. 더욱 미군을 당혹스럽게 만든 건 최루가스가 가득한 땅굴 입구를 빠져나오던 땅굴 쥐들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 동료 병사에 의해 오인 사격을 받는 사례였다. 


하수구 소탕작전까지 수포로 돌아가자, 화가 머리까지 치솟은 미군은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전략회의에 들어갔다. 그때 동물을 이용하자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번득였다. 미군은 독일에서 탐색견 3천 마리를 공수해왔다. 이번만큼은 지난 작전의 실패를 만회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섣부른 판단이었다. 베트남인들은 세계에서 개를 가장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베트콩은 밀림 곳곳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고춧가루를 뿌린다는 말이 그때 나왔다. 개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강물로 뛰어들었다. 또 개들에게 익숙한 미군 비누를 옷에 묻혀 후각을 교란했다. 개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군을 공격했다. 하물며 개들은 부비트랩에 속수무책이었다. 미군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작전을 펼쳤는지 뒤늦게 가슴을 쳤다. 누가 보아도 식량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베트콩들에게 뛰어난 단백질을 제공해준 꼴이었다.


이후에도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서 2만의 병력을 잃었고, 5천 대의 탱크가 파괴되었으며, 256대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또 22대의 함정과 전함이 강바닥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이었다.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이 미군의 심기를 그대로 나타냈다. 미군은 끝내 구찌 땅굴의 실체를 모른 채 베트남을 떠나야 했다.


종전 후 베트남과 외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미군이 가장 알고 싶어 하던 것이 구찌터널의 전모였다.

“솔직히 말해봐. 니들 그때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베트남 군부가 밝힌 구찌터널은 미군의 예상을 초월했다. 총길이가 250km에 달했고, 깊이는 얕은 곳이 3m, 깊은 곳은 8m를 육박했으며, 지하 3~4층으로 된 다층적 구조에 터널의 폭은 80cm를 넘지 않았다. 범위는 사이공 강과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였고, 터널 안에는 병원과 부엌, 침실, 작전회의실, 무기 저장고 등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극장까지 있었다. 가히 인간이 만든 땅굴 중에 최고였다.


이런 명품 땅굴이 가능했던 건 구찌 일대의 지질 특성 때문이다. 석회질 성분이 많아 푸석푸석하고 무르다. 호미 같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땅을 팔 수 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땅굴 내에 산소가 공급되면 겉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천연 시멘트가 따로 없다. 거기다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이어진 통로가 공기 투과율을 높이면서 보수가 용이한 환경을 제공했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없었다면 이 또한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이었다. 포로가 되었건, 농민이 되었건,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치 건, 베트콩이건 어느 누구도 구찌 터널의 실체를 미군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미군이 그토록 열을 올리며 공격하던 곳은 구찌터널 전체로 보면 10%에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했다. 터널을 둘러본 늙은 참전용사들은 그나마 늦게라도 철수한 것이 다행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일부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남부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구찌터널은 단순한 땅굴이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곳이다. 동시에 미국에게는 돌이키기 싫은 실패의 역사다.



*사진 출처

타이틀 배경과 공습 사진 

A napalm strike erupts in a fireball near U.S. troops on patrol in South Vietnam in 1966. 

rarehistoricalphotos.com

Tunnel Rats www.stripes.com


*참고 동영상

Deconstructing History - Cu Chi Tunnels

Tunnel RATS -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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