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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n 23. 2018

빛과 꽃

베트남 여성

빛은 내가 일하던 회사의 디자이너였다. 표기는 Bich로 한다. 하노이식(표준) 발음으로는 ‘빅’에 가깝고, 호치민식 발음으로는 ‘붓’과 ‘빗’ 사이, 내 혀가 흉내 낼 수 없는 어디쯤에 있다. 나는 베트남 직원들의 놀림에도 꿋꿋이 그녀를 그냥 ‘빛’이라고 불렀다. 의미도 발음도 그게 편했다.


그녀는 미국 시민권자면서 베트남 국적도 가지고 있었다. 온 가족이 이민 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재미교포 2세와 결혼했다. 결혼생활 1년 만에 아이를 가졌으나, 임신중독에 걸려 아이를 잃었다.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고통이 뒤따랐다. 몸조리를 위해 홀로 베트남에 돌아와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무역업을 하는 남편이 한 달에 한 번씩 호치민에 방문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었지만 가만있는 것이 좀이 쑤셔 회사에 다녔다.


빛은 베트남 여성 같지 않게 키가 크고 몸이 약했다. 다른 여성들이 아담하고 몸이 다부진 것과 반대였다.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에어컨을 싫어해 사무실에서 항상 두터운 겨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빈혈이 심해서 가끔 졸도를 할 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2년을 살았으나 영어가 서툴러, 회사로 출근하기 전, 새벽에 영어 학원을 다녔다. 역시 영어가 젬병인 나를 상대로 말하기 좋아했다. 우리는 사전을 펴놓고 종이 위에 수기로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호치민을 무척 좋아했다. 태어난 고향이니 그럴 테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했다.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물었더니, 음식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음식이었다. 입도 짧은 그녀가 대체 무슨 식탐이 있어서, 미국 땅에 가족을 내동댕이치고 돌아왔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쯩빗론(Trứng vịt lộn) 알아?”

이름만 듣고 나는 무슨 거창한 음식인 줄 알았다.

“몰라. 그게 뭔데?”

“에그야. 오리 알.”

좀 실망해서 내가 말했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봐야 알인데.”

그녀는 정색했다.

“먹어봤어?”

“오리 알까지 먹을 일은 없지. 계란이 있잖아.”

그녀는 이런 한심한 놈을 봤나 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직 그런 것도 못 먹어보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냐는 듯이 매우 측은한 얼굴로. 

“차원이 달라. 꼭 먹어봐.”

너무나 빛이 찬사를 늘어놓았기에 나는 오리 알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음식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대화가 오간 그날 저녁.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방문에  비닐봉지가 걸려있었다. 쪽지가 있었다. 

‘미스터 문. 이게 진짜 쯩빗론이야. 와이프랑 먹으라고 4개 넣었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먹어. 빛.’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오리 알이 ‘다이(Rau day)’와 ‘옴(Rau om)’과 함께 들어 있었다. 고춧가루가 섞인 소금도 있었다. 퇴근 후에 오리 알을 먹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나 다시 회사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고마운 마음에 비닐을 펼쳐놓고 오리 알을 깼다. 잘 익은 구수한 냄새가 저녁을 먹고 들어온 우리의 혀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내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깬 기분이었다. 오리 알 껍질 속에 거의 부화가 끝난 새끼가 들어있었다. 부리와 날개, 발이 온전한 모습으로 잠자듯이 누워있었다.

우리는 다른 것도 깨 보았다. 모두 똑같았다. 알을 잘못 고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잘 고른 것이었다. 아내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는 빛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라우 다이와 옴을 한 가득 입에 물고 그나마 부화가 덜 진행된 놈을 골라 입에 넣었다. 부리와 털은 도무지 먹을 수 없었다. 괜히 눈물이 찔끔 났다.


빛이 미국에서 돌아온 이유를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여성스러운 척, 고상한 척 유난을 떨더니 이런 잔인한 식성이라니. 그날 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에 오리 떼가 하염없이 날아다녔다. 다시는 오리털로 된 옷을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만난 빛의 얼굴엔 궁금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땠어? 맛있었어?”

“응. 맛있던데.”

나는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 먹었어?”

“그럼.”

때론 거짓이 진실을 이길 때도 있는 법이다.

“와이프도?”

“아내는 한 개 먹고, 내가 다 먹었어.”

그녀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했어. 진짜 맛있지?”

“그래. 근데 부리랑 발은 차마 먹겠더라. 뱉었어.”

“에이 그것도 먹는 거야. 다음엔 꼭 먹어.”

최고의 엑기스가 그것에 함축되어있다는 듯이 그녀는 오독오독 씹는 시늉을 하면서 자신의 단골집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집에 가기 전에 꼭 들렀어.”

“매일?”

“하루도 먹지 않으면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거든.”

나는 그때 빛의 그 행복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얼굴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차마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음에 그 집에 같이 가자. 직접 가서 먹으면 더 맛있어.”


그날 이후, 빛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쯩빗론 가게에 가자고 졸랐다.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에 오리 알을 또 먹을 기회가 있었다. 빛이 사왔던 오리 알보다 부화가 덜 된 것이었다. 쫀득한 계란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알기에는 까다로운 맛이었다. 비둘기, 개구리, 토끼 다 먹어보았지만 또다시 오리 알을 먹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내가 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두어 번 메일이 오가다 끊겼다. 미국에 돌아갔는지, 아이를 다시 가졌는지 알 수 없다. 가끔 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쯩빗론을 먹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 문득 빛 생각이 나곤 한다. 그녀가 호치민에 남아 쯩빗론 가게를 차렸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아마 베트남에서 여자 이름 중에 가장 많은 것이 ‘Hoa’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정’쯤 되는 것 같다. ‘호아’는 베트남 말로 꽃을 가리킨다. 나는 호아라는 이름을 쓰는 베트남 여자를 세 명 만났다. 그녀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한 명은 내가 일하던 회사의 직원이었다. 나이가 나와 동갑이었다. 경리담당자였는데, 똑 부러지는 일처리와 합리적인 운영으로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고용된 베트남인 중에 가장 많은 급료를 받았다. 


한국인 지사장에게도 곧잘 옳은 소리를 하는 당찬 면모를 보였고 직원들에게는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나와 지사장과의 트러블이 가장 고조되었을 때, 위로한답시고 오토바이 뒤에 태워 어딘지 모를 곳에 데려가 점심을 사준 자상한 면이 있었다. 그땐 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데려간 곳이 장어탕으로 꽤 유명한 집이었다. 그녀는 만삭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다가 산달에 휴직을 했다. 귀여운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만 듣고 나는 퇴사했다. 그녀의 복귀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2013년의 캇바섬

다른 한 명은 캇바 섬에 갔을 때였다. 당시엔 무척 외진 지역이라 전기와 통신, 교통 시설이 미비했다. 여행사와 예약이 어떻게 틀어졌는지 캇바 섬에 도착했을 때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인원보다 배에서 내린 인원이 두 배나 더 많았다. 


호텔은 아수라장이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투숙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다. 그때 이런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한 사람이 매니저 호아였다. 그녀는 근처 게스트하우스와 가정집을 빌려 임시 호텔로 정하고 고객의 신상에 따라 방을 배정했다. 영어권과 아시아권으로 나누고, 부부나 가족관계로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등급에 맞게 호텔비를 재조정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불만 없이 한 호텔에서 사이좋게 묵을 수 있었다. 다음날, 두 배나 되는 여행객을 위해 조식 시간을 두 타임으로 나눈 것도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나는 호아가 관광객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때까지 가졌던 베트남 사람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그녀로 인해 악몽이 되었을지 모를 낯선 섬에서의 사흘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물론 그녀도 잠자리만한 모기를 퇴치해주지는 못했다. 캇바 섬 중심의 국립공원으로 트래킹을 떠났던 우리 부부는 모기에게 시달리다 못해 일정보다 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 섬 외진 곳에 있는 시크릿한 해변을 알려주었고, 덕분에 지금껏 다른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인상의 해변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은 한국에서였다. 10년 전쯤 코엑스에서 세계여성발명대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행사가 있었다. 당시 한국발명진흥회에 관련된 일을 하던 때라 취재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세계 각국의 여성단체가 참가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여성동맹이라는 단체가 참석했다. 그 수장의 이름이 호아였다. 


300여 개국의 여성 가운데 내가 그녀를 눈여겨본 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길지 않은 인터뷰 시간에 여성과 발명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기자가 준비한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녀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한국에 오자마자, 결혼이민자 지원센터와 이주여성 쉼터를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인터뷰는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 문제로 넘어갔다. 갑자기 취재 꼭지가 바뀐 것에 당황한 기자는 쩔쩔맸다. 그렇다고 그녀가 막무가내로 혼잣말을 했던 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위트와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후에 그녀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있었는데, 베트남여성동맹이라는 단체부터가 놀라웠다. 단일 단체로 회원 수가 1천만 명이 넘었다. 공산사회라 그런가, 했는데 설립된 해가 프랑스에 종속되어있던 1930년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남자들과 똑같이 총을 들고 싸웠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모든 면에서 여성의 진출이 활발하다. 남녀 성평등 의식도 우리나라보다 높다. 그런 단체의 책임자인 그녀가 ‘한국인 남편이 베트남인 부인을 폭행하고 살해하는 사례’에 대해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하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만난 베트남 여성들은 대체로 예의 바르고 성실했다. 자존심이 좀 센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집만 부리지 않았고 책임과 의무에 충실했다. 권리를 내세우기 전에 상대를 배려했으며, 무엇보다 강인하고 인내심이 깊었다. 베트남이 모든 강대국들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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