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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l 21. 2018

언어의 속살

하노이 호암끼엠 호수에 있는 ‘응옥 썬(Đền Ngọc Sơn)’ 사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던 나는 무심결에 문에 적힌 한자를 읽었다. 지나치듯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였다. 내가 읽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단순한 한자였겠는가.


그런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노랑머리의 외국인들은 감탄했다. 근처에 있던 베트남인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중국인과 일본인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때부터 한자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뜻을 물었고, 나는 모른다는 말도 못하고 진땀을 뺐다.(그 순간만큼은 한국인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런 비슷한 일은 그 후로도 가끔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베트남인들이 한자를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베트남어는 표기를 한자로 하지 않을 뿐이지, 한자에서 나온 언어다. 그래서 한국어와 음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내가 읽은 소리에 사당에 있던 베트남인들이 놀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령, 화장실 앞에는 이런 글자가 있다. nam, nữ.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phòng 방, quốc gia 국가, chuẩn bị 준비, ma quỷ 마귀, sự cố 사고 등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베트남어의 60%가량이 한자에서 나왔다고 한다. 국호인 Việt Nam만 보아도 越南이란 한자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越월을 ‘비엣’으로 南남을 ‘남’으로 읽는다. ‘남쪽의 월족’이란 뜻이다. 

문제는 어떻게 발음하느냐다. 성조가 6개나 돼서 발음이 수월치 않다. 또 남부와 북부의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부산과 평양의 간극보다 더 심해서 호치민 사람과 하노이 사람 간의 대화가 쉽지 않다고 한다. 호치민 사람은 하노이 발음이 표준임에도 불구하고 촌스럽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그들의 입장에서는 남베트남이 통일을 이룩했더라면 호치민 발음이 표준어였을 것이다.)


나는 6개월 동안 하던 베트남어 공부를 때려치웠다. 아무리 해도 ‘nh’와 ‘ng’를 말할 수 없었다. 그 둘을 빼고 베트남어를 한다는 건 한국어에서 된소리 발음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신발’과 ‘씨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기괴한 성조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나는 한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베트남인이 타이핑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쓰러워서 눈물이 난다. 중국 못지않다. 성조 하나하나를 따로 표기해야 하고, 교정을 볼 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잘못된 성조 표기 때문에 인쇄를 다시 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삐침 하나로 의미가 달라진다. 


베트남의 문자가 이렇게 된 것은 한자문화권에 서구의 실용성을 주입한 결과다. 베트남어 창제는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프랑스인 알렉산드르 드로드 신부가 선교를 목적으로 이전부터 선교사들 사이에 사용되던 로마자 표기를 토대로 1650년대에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자 표기에 익숙하지 않은 베트남 인민들은 난생 처음 보는 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점령기에 식민지 관리를 위해 강제로 도입하면서 널리 보급되었고, 이후 독립과 통일을 차례로 겪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 잡았다. 고유성을 훼손하는 무분별한 편의주의라는 반대도 적지 않았으나, 한자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중국에서조차 루쉰과 취추바이를 비롯한 학자들의 탈한자 선언이 이어졌다)이 더 거셌다.


그러나 문자로써 한자를 사용하지 않을 뿐, 한자의 영향은 언어에 남아있다. 한자의 특성상 글자 하나에 여러 갈래의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노래와 시가 발달했다. 관심을 기울인 탓인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베트남은 시(詩)의 나라다. 공원에 앉아 시를 읽는 사람을 적잖이 볼 수 있으며, 친한 사이에 시를 적어 선물하기도 한다.(까마득한 옛날 얘기처럼 들리지만 우리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시를 낭송해주는 프로그램까지 있을 정도다. 시인의 이름을 붙인 길도 많다. 호 쑤언 흥 Ho Xuan Huong과 응웬 쥬 Nguyễn Du가 대표적이고, 최근에는 Nguyễn đinh Thi, Xuan Quỳnh, Diệp Minh Tuyền, Huy Cận 등이 길 이름으로 추가되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이 했다는 이 말은 언어와 생각 간의 연관성과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사용하는 언어로 사람과 사회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 나라의 출판시장 동향은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여행 중에 어떻게든 짬을 내 서점과 시장을 가는 이유다.

어딜 가나 경제와 재테크 관련 서적이 진열대 가장 앞을 차지했다.

세계 지도자들의 비평집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 있다. 이방카와 반기문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장르 소설의 인기는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해리포터와 셜록홈스가 강세였다. 시드니 셀던, 잭 런던, 마리오 푸조의 이름이 보여서 혹시나 스티븐 킹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한류의 영향을 책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도깨비였다. 특별한 케이스에 담긴 양장본 속에 공유의 모습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 밖에도 TV로 방영된 드라마의 사진집이 많았다. 한국 작가 중에선 김중혁의 소설이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없는 서점에 김중혁의 소설이라니. 왠지 뿌듯했다. 의아했던 건  정병설의 해경궁 홍씨였다. 과연 베트남에서 이 책이 읽힐까? 하는 의문과 읽힌다면 어떻게 읽힐까? 하는 의문이 이어졌다. 영조의 며느리에서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로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정작 베트남 소설류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표지부터 썩 내키지 않았다. 문자 예술인 소설을 비주얼로 인식하는 소비패턴에 익숙한 까닭이다. 굿즈와 디자인이 소설 선택의 기준이 된 것이 영 못마땅하면서도 술과 담배처럼 이제는 돌이키기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그건 시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을 떠나서 종과 수가 예전만 못했다. 베트남에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시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세계적인 추세다. 좋은 시 서너 개쯤은 외우고 살았던 시대는 이제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노래가 점점 그렇게 되는 것처럼.

8, 90년대 필독 도서였던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내 방 어딘가에서 먼지와 함께 굴러다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타나시다니. 외국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무병장수하시길.

이래서 일본 만화는 절대 얕잡아 볼 수 없다. 세계 어디에도 팔지 않는 곳이 없다. 파생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우리나라 웹툰이 책으로 출간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역시 호치민은 영원한 아이템이다. 박호라는 칭호가 친숙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은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한 마디라도 베트남인과 직접 대화해보겠다는 의도였다. 부질없었다. 큰 애는 눈치로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금세 깨우쳤다. 식당에서 음식 사진에 손만 올려도 되었고, 약국에서는 아픈 곳을 가리키기만 해도 통했다. 화장실이 급해 들어간 가게에서 둘째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잡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태도와 얼굴 표정, 몸짓이 더 큰 것을 전달한다고 한다. 한 호텔의 매니저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베트남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들려주었다. 아직 영어의 효용성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신기술의 개발이 조만간 인류를 바벨탑에서 해방시켜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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