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우연 Jul 28. 2018

그라운드 전쟁

베트남 축구

4년마다 공으로 벌이는 세계대전. 

동의하기 힘들지만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운 월드컵에 대한 수사다. ‘공’이란 단어 대신 ‘돈’을 넣으면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6조가 넘는 돈(비공식적인 금액까지 합산하면 상상하기 힘들다)이 그라운드에 뿌려진다. 일각에서는 잔디구장이 아니라 돈방석에서 경기가 열린다고 힐난한다. 월드컵을 16세기부터 이어진 제국주의의 연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물리력으로 침략만 하지 않을 뿐, 정서와 자본으로 식민지를 침탈하는 고도의 전술이라는 것이다. 묘하게도 영국,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유럽 열강이 그대로 겹쳐진다. 같은 의미에서 또 다른 강자인 남미는 여전히 유럽의 속국으로 남아있다.(이를 종교와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처음 베트남을 여행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한여름이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버스와 철도를 이용해, 밑에서부터 위로 종단했다.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였다. 거의 마지막 코스에 사파 트래킹이 있었다. 함께 참가한 열 명 남짓한 관광객은 대부분이 서양인이었고 나만 동양인이었다. 그때 만난 이탈리아 사내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점심시간, 반미로 속을 채우고 어떤 폭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다가와,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이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상해서 “그런 넌?”하고 물었더니, 이탈리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잠시 종달새가 머리 위에서 울다가 사라졌다. 함께 있던 프랑스인 부부가 축구 얘기를 꺼내면서 깔깔 웃었다. 


2002년 월드컵 16강에서 만난 이탈리아와 한국전은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경기였다. 쌍방 간에 온갖 반칙이 난무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탈리아 선수들이 입은 유니폼이었다. 우리나라 수비수에게 잡힌 이탈리아 공격수들의 옷이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광경이 카메라에 툭하면 잡혔다. 얼마나 늘어나는지 그 사이로 서너 명의 선수가 들어가 묵찌빠를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옷은 끝내 찢어지지 않았다. 역시 섬유와 패션은 이탈리아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반칙만 두드러져 보였다. 


이탈리아가 먼저 선제골을 넣었고 우리가 후반에 만회골을 넣었다. 팽팽하던 경기의 흐름은 연장전 이탈리아의 유명한 미드필드 ‘토티’가 퇴장을 당하면서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난투극 끝에 승리를 거머쥔 건 대한민국이었다. 분개한 이탈리아인들은 앞으로 한국과의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고, 우리는 ‘콧웃음’을 쳤다.

사진출처 http://www.insight.co.k

내 출신이 드러나자, 여행객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우리는 축구와 일상을 구분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르다. 그들에게 축구는 일상을 초월한 어떤 신앙과 같다. 


‘유로 2000’이 한창이던 무렵에 나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다. 가는 곳마다 난리였다. 경기가 있는 저녁 시간에는 문을 닫는 가게가 많았다. 물이라도 한 병 사러 들어가면 주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가게를 털어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담대함이 느껴졌다. 이긴 날은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였다. 밤새 도로를 가득 메운 차와 오토바이의 경적소리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해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프랑스에게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2년 뒤에 열린 월드컵에서 16강 문턱도 넘지 못하고 탈락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 이탈리아 사내와는 트래킹이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숙소의 문고리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거듭 확인한 후에 잠이 들었다.     


이번 베트남 여행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18 afcu-23 챔피언십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이 결승에 올라가는 이변이 펼쳐졌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 낮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결전을 떠나는 장병과 같은 비장함이 엿보였다.


데탐에 있다가 서둘러 호텔로 복귀했던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마침 경기시간과 맞물렸다. 우버를 불러도 매칭이 되지 않았다. 발이 묶인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호텔에서 경기를 보아야 했다. TV 속의 경기는 눈밭의 ‘설전’이었다. 상대가 우크라이나인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베트남은 북부의 일부 산악지대를 제외하고는 눈을 보기 힘든 나라다. 몇몇 선수는 평생 처음, 그것도 지독하게 눈을 구경했을 터였다.

폭설로 경기가 중단된 틈을 타,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근처 시장으로 나갔다.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했다. 사람들이 가게마다 설치된 TV 앞에 진을 치고 앉아 경기가 속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상기된 얼굴에 눈동자만 반짝거렸다. 호텔로 돌아오자, 경기가 재개되었다. 매우 잘 싸웠고 투지도 좋았다. 다만 날씨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팽팽한 경기는 연장 끝에 아쉽게 베트남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보는 내가 다 안타까웠다. 


경기가 끝나고 거리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창문을 내다보니 온통 붉은색 물결이 가득했다. 우리 가족은 호텔을 나와 인민위원회가 있는 광장까지 걸었다. 설령 택시가 있다고 해도 탈 형편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렇지만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오토바이와 사람, 차가 뒤엉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갔다. 모두 흥분에 들떠 베트남을 연호했다. 아이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피리를 불어댔다.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위에서 베트남 국기가 춤을 췄다. 2002년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았다. 아쉬운 건 우리와 같은 킬링 박수와 4박자 구호가 없었다. 저마다 다른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내가 보기에 언어의 차이인 듯하다. 한국어는 통일된 목소리를 내기에 적합하지만, 베트남어는 성조가 심한 데다, 연음이 많아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통일된 소리를 내기 어렵다.)

사진출처 http://english.vietnamnet.vn

그들의 행진은 밤이 늦도록 계속됐다. 확실히 축구에는 뭔가 민족적인 정서가 녹아있다. 그 어떤 스포츠도 축구만큼 피를 끓게 만들지는 못한다. 동서양,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공으로 치르는 전쟁이라는 말이 딱 맞다.  

*이탈리아의 축구 기질에 대해 알게 된 한참 뒤였다. 유럽의 모든 리그에는 각각의 스타일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리그는 독특하다. 보통 상대편에게 큰 점수 차로 이기는 것을 선호하는데 반해, 그들은 1점 차 승부를 좋아한다. 그것도 상대가 한 점도 얻지 못한 1:0이란 스코어를 최고로 친다. 한 골을 내주고 두 골을 넣으면 된다는 식의 타협은 용납되지 않는다. 한 골도 내줄 수 없다는 강박이 철벽수비를 만든다. 아군의 피해 없는 완벽한 승리, 그것이 이탈리아 축구다.

그에 반해, 베트남 축구는 손실(퇴장, 부상)을 입더라도 이기고 보자는 식이다. 기량과 자원에 비해 자존심이 강해서, 강한 팀 앞에서도 절대 주눅 드는 법이 없다. 지는 한이 있어도 그냥은 질 수 없다는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경기를 펼친다. 강점으로 작용하면 상관없지만 약점으로 작용하면 대량 실점으로 이어진다.



이전 12화 언어의 속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