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우연 Jul 14. 2018

가리봉역으로 가는 버스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 도로, 공원, 하천과 같은 시공간들이다. 눈앞에 에펠탑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파리에 와있음을 상기한다. 그런데 의외로 행인의 옷차림이나 자동차, 음악, 음식과 같은 부차적인 요소를 통해서 도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의 무리에 섞여, 트로트 음악을 듣다 보면 에펠탑은 한순간 동네 프랜차이즈 빵집 앞의 전봇대가 된다. 설상가상 '참이슬'을 들고 "김씨도 한 잔해?"하면서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중년의 아저씨라도 있다면 그날은 세느강에서 청계천 유람을 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문자의 영향력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만리장성에서,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앙코르와트에서 보는 한글 낙서조차 시공간을 초월하는데, 인간의 흔적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나뒹구는 신라면 봉지를 보게 되다면 오죽하겠는가.

 

마트에 들어가 저녁에 마실 물과 야식거리를 고르고 있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보여줄 게 있다며 나를 끌어당겼다. 첫째와 둘째가 한 팔씩 잡아당기고 막내는 등을 떠밀었다. 과자가 진열된 코너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것 같았다. 안된다고 일침을 가하려는 찰나, 큰애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많은 과자 틈에서 한 과자봉지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언뜻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있는 위치와 나의 모국어가 머리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매장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보아도 한글인데 베트남어보다 낯설었다.


그 잠시의 혼란은 내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소위 '소격', 일상 속의 ‘낯설게 하기’였다. 전위 행위, 혹은 설치 퍼포먼스가 따로 없었다.


이런 경험은 이전에도 있었다.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파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한 버스가 내 앞에 스르륵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리봉역과 영등포역을 오가는 마을버스였다. 마침 버스는 다시 출발하려고 매캐한 매연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뒤로 가 빈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탄 버스는 영등포역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운임을 받으러 온 안내원에게 소리쳤다. 정지, ngừng, stop. 내 다급한 목소리에 운전사는 버스를 세웠다. 나는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나를 내려준 버스는 툴툴거리며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로 달려갔다. 사이공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저 다리를 건넜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당시, 호치민의 많은 버스는 우리나라에서 폐차되기 직전의 차를 가져와 적당히 수리해서 사용했다. 매연이 나오는 배관은 둘째치고 외관부터 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굴러만 가면 일단 운행을 했다. 도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에 한글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운수회사는 물론이고 경유하는 지역의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특히 동네 이름이 적힌 마을버스가 많았다. 태권도장에서 몰던 봉고차도 있었다. 태권이라고 박힌 버스로 통학하는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의 모습은 아이러니했다. 


그게 유행이었던지 부러 한글을 시트지에 뽑아 붙이고 달리는 차량도 있었다. ‘흞, 퀿. 띀’과 같이 한글에 없는 글자를 떡하니 붙이는가 하면, ‘차카게 살자’나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몰라요’(이건 한국인의 장난이 분명했다) 같은 얼토당토않은 글자가 판을 쳤다. 나중에 들은 말로, 버스에 한글이 있으면 중고시장에서 가격을 더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겐 한글이 문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그런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로서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놓친 셈이었다.


가리봉동과 영등포를 오가던 그 버스도 그런 버스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버스에 잠깐 탔을 뿐이었다. 한국의 버스가 아닌 베트남으로 이적한 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한국에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내게 착각을 불러일으킨 그 순간이 하루를 통튼 시간보다 생생했다. 그 경험은 나에게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의식과 무의식 경계에 시각과 문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만약 버스의 외관에 가리봉역이 아닌 천국행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어도 버스에 올라탔을까?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가장 절대적인 힘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음산한 분위기의 한 가게가 있다. 편의점이어도 좋고 작은 구멍가게여도 괜찮다. ‘장-피에르 주네’의 ‘델리카트슨’ 같은 곳이면 더할 나위 없다. 가게 안은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다. 익숙한 상품들이 이곳에서는 모두 파괴되어 있다. 포장지와 내용물이 달라, 빵인 줄 알고 집으면 구두약이고, 컵라면인 줄 알고 고르면 세제다. 또 포장지에 적힌 정보도 모두 거짓이다. 글자와 숫자들은 오탈자투성이에 엉뚱한 글귀가 제공된다. 유통기한에 죽을 때까지라고 명기되어있다. 담배를 사면 죽음을 찬양하는 문구가 인쇄되어있다. 

소비 자본사회에서 이보다 더 예술적이고, 이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가 있을 수 있을까? 가게 이름을 뭐로 하지? 뒤죽박죽 우리마트? 나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한글은 물론 영문도 이상하다

*예전엔 외항선을 통해 북한 제품이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중국 제품이라고 한다.



이전 10화 우리가 바나나에 대해 몰랐던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