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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l 07. 2018

우리가 바나나에 대해 몰랐던 것

내가 어렸을 때 바나나는 매우 희귀한 과일이었다. 어디서 선물이라도 들어오면 온 가족이 한 입씩 나눠먹은 후, 대문 옆에 있는 쓰레기통 속에 버리지 않고, 파리가 꼬일 때까지 동네 사람들이 다 보이게 올려두는 유일한 과일이었다. 시멘트로 만든 쓰레기통이 집집마다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식감도, 맛도 별로였다. 푸석하고 미끄덩거리며, 밍밍한 데다, 모양마저 외설적이었다. 그 돈으로 사과나 감을 먹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우유조차 바나나 맛보다 초코나 커피 맛을 선호했다. 바나나가 정식으로 수입되어 마트에서 똥값에 판매되어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바나나의 모호한 색감이 불편했다. 하늘색도 모호하긴 마찬가지지만 대체로 사람들이 공통으로 여기는 색감(cyan 70%에서 100% 사이)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나나는 다르다. 설익었을 때는 연두에서 노랑으로, 익어가면서 Magenta가 가미되다가, 점점 먹(black)이 추가된다. 스펙트럼이 넓어서 사람들마다 떠올리는 바나나색이 다 다르다. 영국의 한 색체 연구소에 따르면 사람들의 인식 안에서 바나나색은 크게 8개로 구분된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여러 이유로 바나나가 거북스러웠다.

바나나는 검은 점이 막 생겼을 때가 가장 맛있다.

그러던 내가 베트남에 살면서 커피와 함께 선입견을 깬 것이 다름 아닌 바나나였다. 직원들과 밖에 나가 점심을 함께 먹게 되는 날이 더러 있었다. 당시엔 식당 테이블마다 바나나가 잔뜩 쌓여있었다. 돈을 받는 곳도 있었지만(값이라고 해봐야 공짜나 다름없었다) 대개 서비스로 올려놓는 디저트였다. 


직원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심심풀이로 그 바나나를 집어먹었다. 나는 이상해서 물었다.

“맛있니?”

직원들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당연한 걸 왜 물어?”

과일의 천국 베트남에서 바나나라니. 

“다른 과일도 많잖아?”

“싸잖아.”

“다른 과일도 싸잖아?”

그러면서 그날 점심 식사 시간은 바나나가 맛없다는 나와 맛있다는 베트남 직원들 간에  때 아닌 바나나 논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의 참패였다. 내 설명을 들은 한 직원의 말 한마디가 입을 막아버렸다.


“그동안 미스터 문이 먹은 바나나는 사람이 먹는 게 아니었어. 그건 원숭이들이나 먹는 거라고.”

엉? 무슨 소리지? 

“그런 바나나를 먹었으니 당연히 맛이 없지. 이거 먹어봐. 생각이 달라질 걸?”

그는 바나나를 하나 꺾어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던 바나나와 뭔가 달랐다. 길이가 짧고 통통하며 단단했다. 나는 다른 직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직원이 건네준 바나나를 조심스럽게 까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베어 물자마자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바나나였다. 사과처럼 아삭한 식감에 단맛이 강했다. 언제 목으로 넘어갔는지 모를 만큼 부드러웠으며, 넘어간 뒤에도 시큼한 뒷맛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았다. 


나는 그동안 한국에 원숭이 먹이를 수입한 업자들을 원망했다. 물론 직원의 말은 과장이었다. 그날로 나는 바나나 마니아가 되었다. 퇴근 후에 종류별로 사서 밤새 먹어치웠다. 매일 아침, 바나나 껍질이 쓰레기통에 가득했다.


바나나가 세계적으로 1000종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이다. 베트남 시장에만 10여 종이 거래된다. 가장 맛있는 건 ‘주오이런’과 ‘주오이삽’이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홋’, ‘카우’, ‘봄’은 생산물량이 적어 비싼 편이고, 흔한 ‘헝’과 ‘후엉’, ‘라바’는 사이즈가 크고 가격이 싸다.


맛있는 바나나는 귤처럼 알이 작고, 단단하며 껍질이 얇다. 만져서 물컹거린다 싶으면 먹지 않는 게 낫다. 딴 것을 바로 먹기보다 껍질이 노란색으로 바뀐 다음 검은 반점이 막 생기려는 시점에 먹어야 맛있다.

바나나꽃

놀랍게도 바나나는 거대한 풀이다. 절대 나무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르는 과일로, 밀, 쌀, 옥수수,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다. 감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바나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도 많다. 바나나는 버릴 게 없는 작물이다. 열매는 먹고, 잎은 대나무처럼 음식을 보관하는 용기로 사용된다. 바나나 잎에는 음식을 보존하는 성분이 있어서 추석에 먹는 떡을 잎에 싸서 보관한다. 꽃마저 식용으로 쓰여, 중부지방에서 먹는 쌀국수에는 바나나 꽃이 들어간다. 특별한 향이 있는 건 아닌데 얇게 저며서 국수와 비벼 먹으면 감칠맛이 난다. 


길거리 음식으로도 훌륭하다. 굽거나 튀겨먹으면 고구마와 같은 단맛이 난다. 후에의 바나나 팬케이크는 명물이다. 아내와 후에를 여행할 때, 심심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바나나 팬케이크를 먹곤 했다.

바나나 튀김. 맛잇다는 말 밖에. 가격도 저렴.

그런 바나나가 몇 해 전부터 비싸졌다. 3,000원이면 한 송이를 사던 것이 이제는 5,000원을 주고도 반 송이를 사기 어렵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중요한 간식이 사라진 것이다. 이게 다 파나마에서 처음 생겼다 하여 ‘파나마병’으로 알려진 마름병 때문이다. 마름병에 걸린 바나나는 뿌리부터 마르면서 썩어간다. 약도 예방책도 없는데, 전파력은 강력하다. 한 지역에 파나마병이 퍼지면 지역 내에 있는 모든 바나나가 다 죽는다. 80년대에 말레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례다. 


요행히 과학자들은 바나나가 파나마병에 취약한 이유를 밝혀냈다. 세계 유통시장을 장악한 글로벌 기업들 때문이다. 1000종이 넘는 바나나를 기업들은 상품(수익성)의 가치로 판단하였다. 일단 커야 하고, 빛깔이 좋아야 하며, 씨가 없고(씨 있는 바나나가 의외로 많다), 싼 가격에 재배가 되어야 하며(바나나는 생명력이 강해서 꺾꽂이로 번식한다), 껍질이 두꺼워 유통과정에서 물러터지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한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캐번디시’라는 종이다. 대기업들의 입맛에 따라 동남아시아에 있는 가난한 농민들은 원숭이들만 먹었던 바나나를 키우기 시작했다. 다른 품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규모 캐번디시 농장이 세워지고 다른 품종은 점점 사라졌다. 


그러다 신종 파나마병이 발병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바이러스는 조류독감하고 비슷해서 여러 변종을 낳았다. 예방약이 강할수록 내성도 함께 강해진다. 만약 바나나가 다종이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래봐야 한 두 종만 사라지면 그뿐이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현재 세계에 남아있는 유일한 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에 와서 부랴부랴 다른 종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전문가들은 캐번디시도 1960년대에 멸종한 ‘그로미셸’과 같은 운명에 놓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훗날 새로운 품종이 등장하겠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남아있는 한 결과는 매번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곧 한 송이가 아니라, 낱개에 5,000원을 호가하는 날도 머지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바나나 먹는 게 자랑거리가 되는 날도 오게 될 것이다.


댄 코펠이 쓴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바나나’라는 책을 보면 유전자를 조작한 바나나의 등장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파인애플 맛이 나는 바나나, 피자맛 바나나, 허니버터 바나나도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책을 읽다 보면,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따 먹었다는 선악과가 바나나였다는 설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믿음이 생긴다. 수많은 과일 중에서 껍질을 ‘벗겨’ 먹는 과일은 바나나가 유일하다. 귤은 ‘까’ 먹고, 사과는 ‘깎아’ 먹고, 수박은 ‘잘라’ 먹는다. ‘벗긴다’는 의미는 곧 ‘입힌다’와 한 맥락이다.

해마다 열리는 과일 축제

언제까지 베트남에서 여러 종류의 바나나가 팔릴지 의문이다. 10년 뒤에도 맛보고 싶은 것이 단지 내 욕심만은 아니다. 과일이든, 동물이든, 곤충이든, 인간이든 한 종으로는 영원할 수 없다.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섞이는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해서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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